세 명의 여자가 다녀간 페이지

버리지 못하는 물건 5. 밑줄이 그어진 중고책을 고르며

by 은영

사고 싶은 책이 생기면, 그 책이 신간이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중고서점을 이용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펼치기 힘든 책들의 새 주인이 된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중고책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있는데 완전히 깨끗한 책보다는 전 주인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것을 선호한다. 가령 진한 검정 볼펜으로 힘을 빼고 그은 밑줄 같은 거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의 일이다. 그 시절에도 어김없이 중고서점을 기웃거렸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DJ가 읊어주던 구절이 마음에 들어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어놓고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책이 있었다. 그건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라는 에세이집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중고서점이 눈에 띌 때마다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늘 책을 찾을 수 없어서 표지도 구경하지 못한 그런 책이었다. 그러다 뉴욕 여행 하루 전 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린 서점에 '오늘 들어온 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의 지루한 비행을 달래주기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혼자다. 당신도 혼자다. 연인이 있어도 혼자고, 연인이 없어도 혼자다. 결혼을 했어도 혼자고, 결혼을 안 했어도 혼자다. 다만, 소설을 읽는 혼자는 소설을 읽지 않는 혼자와는 다르다. 당신은 소설 읽는 혼자이길.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 중에서


에세이집 제목의 '혼자'라는 단어에 이끌려 펼친 이 책에는 혼자인 사람이 혼자인 사람에게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이 책에는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관통하는 서른세 편의 소설이 등장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소설의 문장과 함께 외로움에 맞서 웃고 울고 사랑하고 아파하는 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혼자로 살아가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20211011_030343859_iOS.heic 책의 전 주인이 남긴 노트

페이지 사이를 달리던 내 두 눈은 어느 문장에 잠시 멈춰 섰다. "지나친 책임감도 병이다. 행복을 망가뜨리는 병."이라는 구절에 책의 전 주인이 쳐 놓은 밑줄을 발견했다. 다음 장을 넘기니, 그곳에는 그의 노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에세이가 소심한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충고 같다가도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따뜻한 충고 같다며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책을 통해 말을 하고 있는 작가, 읽으며 감상을 써 내려간 책의 전 주인, 그리고 지금 이 페이지를 펼친 새 주인인 나까지 세 명의 여자가(전 주인의 성별을 알 순 없지만, 나는 그가 여성일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이 책을 두고 함께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들이 연결되어 이 페이지에 함께 도란도란 머물고 있었다.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나는 가방에 넣어 둔 iPhone4를 떠올렸다. 사용한 지 오래돼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걸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행 짐을 쌀 때 같이 챙겨 둔 것이었다. MP3 플레이어를 쓰던 습관 그대로 첫 스마트폰이었던 그 iPhone4로도 음악 파일을 넣어서 노래를 듣곤 했다. 버리지 않고 챙겨두었던 30핀 케이블로 충전을 했더니 아직 제법 쓸만했다. 나는 Feeder의 Feeling A Moment를 재생했다. 전주가 흘러나오자 책에 대한 감상이 더 짙어졌다. 밑줄을 친 그가 지금은 자신을 괴롭히던 책임감을 내려놓았을지 궁금해졌다. 부디 그가 행복에 더 가까워졌기를 바라는 내 마음에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일어났다.

중고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은 '혼자'라는 단어보다 '연결'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쓴 이의 독백이 누군가에게 닿아서 고백이 되었고, 그 고백의 문장을 밑줄 치고 노트를 적은 이의 마음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으니 말이다. 나 혼자서는 놓쳤을지도 모르는 문장에 생각이 흩어지지 않고 겹겹이 쌓일 수 있었다. 두 명의 여자와 함께 나누는 풍부한 감상에 묘한 행복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중고책을 사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흰 구름 사이를 가르던 비행기 창 밖으로 활기찬 뉴욕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자마자 뉴욕 중심에 있는 스틀랜드 서점을 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빨간 바탕에 흰색 글씨로 서점의 이름이 쓰인 가게를 금방 찾을 수 있겠다며 웹 서핑으로 미리 본 사진을 떠올렸다. 종이 냄새 짙게 나는 중고책들이 쌓인 서점 앞 매대를 제일 먼저 들리기로 했다. 지난 세월을 간직한 채 노랗게 바랜 책장 사이에서 낯선 밑줄이 주는 행운을 만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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