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의 맑음

안동 계상학림의 정적

퇴계 이황의 이야기 혹은 생각을 많이 접한 적은 있지만 그가 가르쳤다는 학당이나 종택은 올해 처음 방문해본다. 퇴계종택으로 가기 전에 자리한 계상서당 혹은 계상학림이라고 불리는 고택은 가는 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만 보는 시야가 다르다. 사람됨을 살피는 데는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한다. 마음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흐리다고 한다. 또렷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만난 계상학림은 앞에 만들어져 있는 국도를 빼고 본다면 참 아늑하면서도 배움을 제대로 청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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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길이라고 생각했던 길이 길이 아닐 수도 있고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최선이 아닐 수가 있다. 어느 시기에는 그것이 길이었고 최선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길이나 최선이 아닐 수가 있다. 그것을 자신에게 납득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똑같지만 그걸 어떻게 지혜롭게 헤쳐나가느냐에 따라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 속에서 머물러서 자신을 좀먹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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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흐르는 천을 건너가면 자리한 계상학림은 퇴계선생이 5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특히 율곡선생이 23세에 이 곳에서 퇴계선생과 도학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 곳이다. 퇴계 이황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냐면 조선시대에 한양이 아닌 지방에서 시행한 유일한 대과 시험은 바로 도산별과였다. 도산별과는 퇴계 선생을 참 선비로 추앙했던 정조 임금의 뜻에 따라 1792년에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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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역시 春日訪溪上學林하였다. 즉 이렇게 날이 좋은 봄에 계상학림을 방문했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와 학문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단순히 의학이나 법을 전공한 것을 학문을 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자신의 전공에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며 다른 분야에 폭넓으면서도 통찰력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행보를 하였다. 정치적은 삶을 청산하고 고향 산하로 내려가 터를 정해 서당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한 퇴계는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알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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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이고 나는 난데 아무리 내 옆에서 벌거벗은 무례한 행동을 한들 네가 어떻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가진 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고 싶은 길로 가는 것은 실력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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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조선에서도 많은 추앙을 받았지만 일본에서도 유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임란 이후에 이황의 문집은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 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 책이 일본 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 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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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에 주자대전을 입수하여 이해하기 시작하던 이황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한다. 이미 사람은 태어날 때 만물이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평생을 그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상당 부분을 찾아서 마음이 풍족한 사람도 있다. 자신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밖에서 찾는 사람은 자기 내면을 영원히 돌아보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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