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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Aug 05. 2020

쓴소리든 잔소리든 사양합니다

백수는 힘들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놀고먹는 것 같지만 그렇게 태평해 보이는 백수의 속은 매일이 지옥이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겠다고 선언을 했어도 어차피 기한이 있는 신선놀음이다. 수중에 있는 돈이 떨어지면 그날로 백수의 일상은 망가진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백수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에 백수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가끔 이렇게 현타가 올 때면 듣고 싶은 말은 주로 정해져 있다.


“그래그래, 너 많이 힘들겠구나. 괜찮아. 언젠가 일은 구해지겠지.”


그런데 따뜻한 위로가 아닌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말을 들을 때가 생긴다. 그런 말은 보통 이렇게 시작된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니까.


내 경험에 비춰봤을 때 ‘나 잘되라고 하는 소리’의 대부분은 아프다. 힘들고 지쳐서 기대고 싶은 나의 어깨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대신 힘껏 붙잡고 앞뒤로 흔들며 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내 힘듦과 아픔에 대한 공감과 위로 대신 본인의 잣대에 비추어 나를 재단하고 옳고 그름을 판가름한 누군가는 끝내 최종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난다.


“넌 그게 문제야.”


바라지도 않던 ‘내가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마음껏 내 마음을 제 집처럼 헤집어 놓는다. 이럴 땐 그 사람이 해주는 나를 위한다는 말이 정말로 나를 위한 말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남의 일이라고 너무 함부로 말하는 거 아냐?’ 괜히 부아가 치밀고 내가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조금 억울해지기도 했다.


나를 위한 말이라며 상대방이 해주는 말은 사실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일 때가 많았다. 나도 다 알지만 내 마음이 지금 그렇게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뿐인데,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아파서 좀 기대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마음이 들면 그때부터 나를 위한다던 상대방의 마음은 실종된다. 나의 나약함에 대한 비난과 힐책만이 부각 되어 다가온다. 이때가 바로 나를 위하는 상대방의 쓴소리가 잔소리로 바뀌는 시점이다.


쓴소리와 잔소리는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나를 위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말을 듣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확연히 다른 말이 된다.


쓴소리는 듣기엔 편치 않고 거북함이 들지만 결국엔 듣는 사람도 스스로에게 필요한 조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말이고, 잔소리는 듣는 것도 싫고 내용도 공감이 안 되는 말이다.


당신이 한 말이 쓴소리인지 잔소리인지는
듣는 사람이 정한다


결국, 쓴소리와 잔소리는 듣는 사람에 의해 정해진다. 정확히는 듣는 사람이 얼마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쓴소리와 잔소리가 정해진다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이러한 능력이 부족해서 친구를 더 크게 상처 입힌 적이 있다. 지금까지 20년 이상을 알고 지내는 친구가 중학생이었을 때 나에게 전화를 했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확실한 건 당시의 내 친구는 지쳐있었다.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나는 거기다대고 조언을 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잘못한 거야. 그래서는 안 됐어.”


서툰 훈수질을 하던 내게 친구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그냥 공감해주는 것뿐이었어!”


그때 나의 서툰 쓴소리가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말에는 힘이 있다.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의 자존감을 뭉갤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힘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기를 꺾어놓을 수도 있다.

 

백수일 땐 이러한 말의 힘을 버틸 수 있는 맷집이 부족해진다. 나의 기를 꺾고 힘이 빠지게 하는 말들은 피하거나 버텨내야 하는데, 그럴 힘마저 없을 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에겐 그 어떤 조언도 조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나를 위한다는 상대방의 말들은 듣기엔 거북해도 내게 도움이 되는 쓴소리가 아닌, 나를 상처 입히는 또 하나의 잔소리가 될 뿐이다. 이럴 땐 먼저 선수쳐 보는 건 어떨까?


나는 상처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상대방이 나를 위해 하는 쓴소리가 잔소리로 바뀌기 전에 지금은 조언 대신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게 저런 게 잘못됐다’는 지적질 말고 나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하다고 먼저 선언해 버리는 거다.


나는 지금 너무 힘들고, 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너의 조언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나의 아픔을 말하고 싶은 거니까 일단 들어만 줄 수는 없겠냐고. 그렇게 먼저 말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말이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되어 나를 상처 입힐 가능성은 많이 낮아진다.


나는 상처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자신의 마음이 이미 다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 거기에 일부러 비수를 꽂을 필요는 없다.


내가 아프고 힘들 땐 미리 말해버리자. 나 이미 많이 아프고 힘드니까 네가 하려는 지금 그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누군가의 쓴소리가 잔소리로 바뀌기 전에 먼저 손을 올리자. 나를 정말로 위한다면 네가 하고 싶은 그 말을 그만 멈춰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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