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창작자로 뿌리 내린 나
️ 여기, 인제, 이런 내가 있어요
올해 가장 커다란 보름달이 뜨는 10월이 다가왔습니다. 서울과 하추리를 오갔던 6개월의 여정도 이제 종지부를 찍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그리고 쓴 것들을 모아 퇴고를 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는 그 동안 무엇을 경험했지?’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만 하면서 똑같은 패턴 안에서 계속 맴도는 나를 탈피하고자 무턱대고 인제 행을 감행했던 일. 그러면서도 돈을 벌지 못할까봐 서울에서 들어오는 강의들을 놓지 못하고 전부 해내느라 몸살을 앓았던 일. 낯선 지역에서 적응하느라, 친구들을 인제에 초대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버린 일. 창작을 하러 와 놓고 정작 창작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느끼고, 단단한 창작자로 살아남기 위해 108배도 해보고 아침 루틴도 만들어 가며 애를 써본 일. 참으로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어르신들과 관계 맺을 일 없었던 제 삶에 '안 주인 어르신'들이 생겼습니다. 명절에 뭘 챙겨가는 건 아니어도 오가는 길에 우유와 빵을 사다 드립니다. 제 방문 앞에는 늘 밤과 대추가 놓여있습니다.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손 잡고 집까지 함께 걸어오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제 삶에 없던 따뜻한 관계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웃 동료 작가님의 아이들과 계곡에 놀러 나갔던 일도 떠올랐습니다. 방문 미술을 할 땐 돈을 벌기 위해서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이제는 전혀 다른 형태로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그래, 나는 역할이 바뀌는 경험, 삶이 새로 쓰이는 경험을 했구나.’ 말 그대로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걸 삶으로 느낀 것 입니다.
삶의 시야와 각도가 넓어졌습니다. 저는 이제 산딸기 잼도 만들줄 알게 되었고, 인제에 오는 친구들에게 인생을 나눌 줄 알게 되었으며, 마을 어르신들과 귀촌인들에게 그림 그리는 재미도 선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납작한 종이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하추리에 와서 알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경험에서 온 모든 감정과 마음의 변화들을 곧 '성장'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가슴으로 깨닫습니다.
저는 이제 작가로서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떼어보려고 합니다. 오직 저만이 걸을 수 있는 그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아침 마다 책을 읽으며, 마음 속에서 마중물 처럼 우르르 쏟아지는 염감들을 성실하게 적어 담으며 제 자신을 마주합니다. 뭘 보고 베끼는 그림이 아니라 온전한 한 장을 그려가면서,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나갑니다.
그리고 또 다시 꿈꾸어 봅니다. 모든 창조자들과의 연대를. 여기 이런 내가 있다고, 그러니 당신도 그 자리에서 스스로의 무언가를 길어내고 있다면, 그런 우리가 만나서 창작할 수 있는 또 다른 자리를 만들어 나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