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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요코 May 22. 2021

위암 4기 아빠의 딸로 산다는 것

#1. 예고없이 온 아빠의 암

2018년 9월쯤이었나, 여느 때와 같이 퇴근하고 집에 와서 하루의 고단함을 풀려고 하는 찰라에 고향에 계시는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평소 엄마 아빠랑 통화를 자주하였기에 반갑게 전화를 받았고, 엄마는 놀라지 말라는 말과 함께 차분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아빠가 위암을 진단받았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곤 아빠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다.


내가 처음 아빠한테 했던 말. “그러게 평소에 술 좀 마시지 말라 했잖아”라고 순간 아빠를 질책하다 아니다 싶어 위암 몇기냐고 물어봤더니, 고향에 있는 대학병원에서는 내시경으로 보아 2-3기 정도라도 진단하셨다고 말씀해주셨다. 너무 당황스럽고 눈물이 나서 전화를 황급히 끊고 네이버에 위암 2기,3기 생존률을 검색하가며 사태 파악을 했고, 동시에 아빠에게 미안했던 일들이 생각나며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당시 나에게 아빠의 위암 선고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고, 당장이라도 아빠를 잃을 것만 같았다. 주말에 당장 ktx표를 예매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아빠를 보기로 마음 먹었다.


오빠는 아빠 앞에서 울지 말고 최대한 담담하라고 여러번 말했다. 우는 모습을 보면 아빠가 더 힘들어 하실거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아직까지 면허가 없는 나를 우리 아빠는 항상 태워다 주시고 데릴러 오셨다. 그 날도 역시 기차역 앞에 아빠가 데릴러 오셨고 집으로 가는 길 대화를 나누었다. 교수님이 어떻게 진단 내리셨는지, 향후 치료는 어떻게 해야할지 이야기하다가 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기분이 어때?” 아빠는 “서연아, 솔직히 아빠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단다.”라고 하셨다. 사업이 잘 되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아빠에게 그 당시에는 죽음이란게 두렵지 않아 보였다.(하지만 최근에 들은 이야기로는, 아빠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에 대하여 큰 슬픔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살고 싶다는 생각..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 우리 아빠에게는 간절함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나의 마음을 절절하게 만들었다.)


고향에 있는 대학병원에는 치료의 한계가 있는 듯 보여 서울대병원에서 진료를 다시 받기로 하였다. 서울대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포함한 여러 검사를 다시 하였고, 검사 결과를 한참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나 길고 두렵던지, 아직도 그 날들은 아빠도 나도 잊혀지지 않는 숨막히고 입이 마르는 날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검사결과가 나와 진료를 받게 되었는데, 2-3기정도로 생각했던 우리 아빠는 위암 4기로 결정되었고, 담당 교수님께서 4기와 말기는 또 다르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받고 진료실을 나왔다. 위암 4기의 아빠는 그렇게 투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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