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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요코 May 30. 2021

운명이라는 것

#5. 엄마가 전해주는 작지만 큰 이야기

운명[운ː명]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아빠가 아프시고 난 뒤, 우리는 선택할 일이 많아졌다. 병원, 담당 교수, 숙소 하다못해 저녁 메뉴까지 선택의 연속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들과 우리가 다른 단 한가지는, 선택의 결과가 아빠의 생명과 연관된다는 것이었다. 크던 작던 아빠에게 영향을 주었기에 늘 선택에 있어서 부담이 있었다. 아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끼칠까봐 고민 또 고민을 해서 선택했고 행여 선택의 결과가 예상 밖으로 좋지 않으면 자책하곤 하였다.


하루는 항암주사를 다 맞으신 아빠는 민어지리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열심히 나는 검색을 하였고 여의도 어딘가에 민어탕을 파는 음식점을 발견했다. 그 곳으로 이동한 뒤 메뉴를 보고 자신 있게 민어탕을 시켰는데 빨간 매운탕이 나온 것이다. “아차, 아빠 지리 먹고싶다고 했었지. 지리로 변경하는 것을 깜빡했어. 미안해 아빠” 아빠는 괜찮다며 식사를 하셨는데 위가 안좋아지신 아빠에게 매운 양념이 좋지 않을까 식사시간 내내 조마조마 하였다. 그 날 나는 내가 한 실수(선택)을 자책하며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한 적이 있었다.


이렇듯 우리는 늘 우리가 한 선택을 자책하고 의심하며 지냈다. (아빠가 수술하셨으면 지금보다 나으셨을까? 아산병원, 세브란스 등등 여러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으면 치료가 달라졌을까? 아빠가 영양제 같은 걸 맞으며 보조치료를 했으면 첫번째 항암제의 내성이 늦게 나타났을까?) 이러한 생각들이 항상 마음 한켠을 무겁게 짖누르며 실체없는 불안과 죄의식으로 다가왔다.


4월의 어느날 오빠 운전하는 자가용에 아빠, 엄마, 내가 타고 인천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아빠의 생신 기념 여행이었고, 작년 한해동안 가족 적금으로 모은 회비를 처음으로 사용한 여행이기도 하였다. 아빠가 아프시기 전에는 생신은 당연스레 일년마다 돌아오는 축복의 날이었다면, 지금은 일년동안 잘 버티셨기에 맞이할 수 있는 귀한 날이다. 그런 날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가족 넷은 날짜를 비워두고 함께 인천으로 떠났다.


여담으로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나신 아빠는 바다를 벗 삼아 살아오셨기에 종종 바다 이야기를 하셨다. 서울에서 가까운 바다. 동해보다는 예쁘진 않지만 서해면 뭐 어때! 그렇게 행선지는 인천으로 정해졌다. 인천으로 가는 시간 동안 우리는 이런 저런 사는 아야기로 시간을 메웠다. 꽤 긴 시간동안 오고 갔던 많은 이야기 중 뭉근하게 울림을 주었던 엄마의 이야기를 공유하려 한다.


00아,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란다. A를 선택하면  B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후회하고, B를 선택하면 A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후회한단다.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뿐더러 알 수 없는 것이 또 인생이란다. 어떠한 말로도 설명되기 힘든 인생을 우리는 결국 “운명”이라는 단어로 받아들이고 위로하며 산단다.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이 있다면, 결국 우리가 하는 선택들은 큰 의미가 없다. 그저 정해진 삶의 여정 속의 과정일 뿐. 누군가에게는 정신 승리로 느껴질 수도 있을 말이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리고 지금까지도, 언젠가 아빠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과 부담 속에 사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  “그래. 어쩌면 이 역시 아빠의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몰라. 그러니 그냥 마음 졸이지 말고 겸허히 담대하게 받아 들이자”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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