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빠 인생의 몇조각
평소 아빠는 나에게 건강한 사람인듯 보였다. 학창시절에 검도를 하셔서 유단자이기도 했고, 작은 키(165cm)였지만 달리기가 참 빠르셨다. 힘이 좋으셔서 무거운 물건도 쉽게 드셨고 떡두꺼비 같은 두꺼운 손으로 잘 열리지 않은 뚜껑도 척척 열어주셨다.다만 술을 좋아하시고, 많이 드셨던게 걱정이 되었었긴 했지만.
한 때 아빠는 잘나가는 사업가였고 직원 여러명과 함께 컨설팅회사를 일구시던 사장님이셨다. 어린시절 아빠 회사에 가면 경리 이모와 나가서 아이스크림 사러 가전 기억이 난다. 능력 있으셨고 늘 자신감에 차 있던 아빠였다. 그러던 중 아빠는 생수사업을 하시겠다고 경매로 공장을 인수하셨고 거액이 투자금으로도 잘 풀리지 않게 되자 많이 힘들어 하셨고, 그 때 술을 많이 드셨던 것 같다. 술이 그 순간에는 위로와 힘이 되었겠지만, 훗날 결과론적인 입장에서는 아빠의 건강을 야금 야금 갉아 먹었던 무서운 존재였을 것이다. 술을 드시고 오는 날들이 잦아지고, 엄마와 다투는 날들이 많아지며 지켜보는 나는 불안했고 아빠가 미웠다.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갔다. 드시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또 잘 드셨던 아빠가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잘 못하시고 있었고 무엇보다 힘이 없으시다며 계속 몸져 누워계셨다. 아빠가 무엇이라도 드셔야겠다며 지친 몸으로 김치를 만드셨는데, 아빠가 나보고 먹으라고 권하니 “아빠 나 다이어트 하잖아 왜 자꾸 먹으라고 해!!”라고 답했던 내 자신이 너무 후회스럽다.
간호사였던 엄마가 아빠를 보니 소화가 잘 안되시고 무엇보다 살이 빠지는 것을 보고 검사를 받게 되었고, 그 때부터 위암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환우로, 엄마 오빠 나는 환우 가족이 된 것이다. 고향에서 서울로 진료와 치료를 받으러 오가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오빠와 나는 서울에 있기 때문에 고향에서 서울까지 진료를 받으러 오는 것은 오롯이 아빠와 엄마 몫이 되었고, 올라오신 날에는 오빠와 내가 마중나가 식사를 하고 병원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아빠가 진단 받고 초반에 들었던 생각은, 어쩌면 지금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였다. 더 이상 아빠는 술은 못 드실테고, 자연스레 엄마와 덜 다툴테니 그렇다면 그래도 이전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빠가 점점 호전되실거라는 전제 하에 말이다. 아빠가 아프면서 우리 가족은 더 찐뜩하게 모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오히려 더 화목해지고 따뜻해졌다. 당시엔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나아지실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