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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진 leeAjean Sep 18. 2024

[소설] 16화_네가 짓는 미소 중 사랑은 몇 개나 돼








20


그녀가 나가고, 대청소를 했었다.


 책꽂이 밑에 떨어진 공책을 한 권 발견했다. 낡은 공책이었다.


 바닥 청소를 자주 안 했던 터라 먼지가 공책에 눌어붙어 버렸다.


 손으로 표지를 문지르자 옅은 먼지가 손가락 동선을 따라 밀려 나갔다.


 대충 공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는데,


 한 문장이 보였다. 글씨체를 보아 내가 쓴 건 맞는데… 어쩌다 이런 문장을 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이라는 말은 두근 거림을 품고 있다. 처음 책을 읽고, 처음 글을 쓰고, 처음 여자와 자고, 처음 이별한다. 그리고 신을 떠올린다.

 처음은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두근거림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설렘이 식어버릴 때 형체 없는 사랑 또한 사그라들 테니.






 자세히 보니 문장 아래로 비스듬히 적힌 낙서가 한 줄 보였다.


 읽어보고 싶었지만, 연필로 두껍게 덧칠돼 있어서 읽을 수 없었다.


 눈에 힘을 주고 읽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다른 문장을 읽기 위해 다른 노트의 페이지를 넘겼는데, 종이 뒷면에 연필 자국을 발견했다.


 살짝 파여 있어서 손가락으로 더듬을 수 있을 정도였다.


 페이지를 붙잡고, 넘겼다 다시 돌아왔다를 반복하며 덧칠해진 문장을 읽었다.






 [네가 매일 짓는 미소 중 사랑은 몇 개나 돼]



 

아는 사람의 글씨체였다.




 연이 집을 나가고 몇 달 후의 일이다.


 연이 고향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살이라고 했다.


 유언은 따로 없었다고 한다. 슬퍼해야 할지, 그저 속 시원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가지 사실은 내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는 거다.


 그녀의 마지막 고백에 나는 답할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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