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2부
“세상은 언제나 변해가고,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TV에서는 여러 방송에 출연하여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 나와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카메라에는 그의 웃는 표정이 보였다.
“그런 사람들을 저는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근성도 없고, 나약한 거죠. 이 이상의 명확한 설명이 있을까요? 아무튼 현재와 같은 상황은 일시적이고, 어쩌면 유행일지도 모르죠.”
목소리는 진지했지만, 여전히 표정은 밝아 보였다. 방송의 진행자도 그의 말에 재차 공감하며 맞장구치고 있었다.
“저도요, 개인적으로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짜여진 방송의 MC가 억지로 출연자의 말에 동의하는 것과는 느낌이 달라 보였다.
“제 말에 동의해 주시다니, 기쁘네요.”
“그럼요. 하하, 그럼 다음 주제는 세계적인 스타가 된 아민…”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티비 프로그램의 내용이 계속 맴돌았다.
‘교수님’이라 불리는 사람은 목소리가 낮고 묵직하여 내용이 똑바로 들리지 않았다.
대신 방송 화면에 자막이 노출되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막은 조그맣게 화면 아래 위치해 있었다.
자막에는 진행자와 교수님, 두 사람의 말을 받아 적은 자막 옆에 [웃음] 이라는 자막이 한 개 더 박혀 있었다.
“~유행일지도 모르죠. (웃음)”, “~교수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웃음)” 이런 식으로 말이다.
유행, 나약함도 유행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자.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짜여진 방송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정말 둘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아니라면, 어쩌면 티비속 스피커들이 말하는 사람은 나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방금까지 방송에서 다루던 주제는 ‘증가하는 자살 인구 증가를 막을 방법은 없을까?’ 였다.
이 주제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 지 꽤 되었다. 죽을 만큼 살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겪어야 죽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의 누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
통계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매체에서 자살은 ‘선택’이라는 단어로 적절히 포장된다.
뉴스에서는 해당 사례를 ‘극단적 선택’이라고 표현한다.
난 그 단어 선택을 싫어한다. 결국 외부요인이 아니라 자신의 결심이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이유가 있을 거다. 생명은 다음 대를 잇기 위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미 다음 대를 이은 상태라면 희생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지만, 어찌 됐건 결국 살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극단적 선택’이란 행위는 생명에게 모순된 말이다.
현대 인류는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살고 있다. 풍요롭다 못해 넘치는 시대다.
넘치리만치 많은 재화와 정보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배는 점차 차오르고, 심신의 여유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여러 생각 중에서 가끔은 저 너머의 세상에 대해 상상한다.
사후 세계 따위의 고민이 그것이다.
이런 고민 끝에 도달한 지점에서, 아마 신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때 인간은 스스로의 날개를 부러뜨리고,
극단적 선택을 결심한다.
이제 남겨진 이들의 시점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쳐보자, 당신 그 사람의 극단적 선택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나라면 우선 밥부터 굶을 거다. 대략 5일 정도, 딱 그 정도가 적당하겠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프다.
굶으면 배가 고픈 건 당연한 거다.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한 마디로 연비가 안 좋다.
에너지가 떨어진 신체는 비상이 걸린다. 이제 당장 가용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켜 영양소를 채울 방법을 떠올린다.
두뇌 회전이 급속도로 빨라진다. 며칠 전 부엌 선반에 올려둔 인스턴트 컵라면을 떠올린다. 유통기한이 지난 라면이라 버렸어야 했는데, 귀찮아서 대충 올려둔 터였다.
사실 유통기한은 중요치 않다. 이미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전기 포트에 김이 올라오면, 뚜껑을 벗긴 컵라면 용기에 뜨거운 물을 채운다.
방금 물을 부었기에 아직은 면이 딱딱하게 말라 있는데, 괜히 젓가락으로 휘적여본다.
젓가락으로 계속 쑤시면 면 사이가 적당히 말랑해진다.
이 상태의 라면을 집어 먹는다. 너무 뜨거워 입천장을 다 데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다. 정신 차리면 면은 하나도 안 보인다. 다시 새로운 인스턴트 컵라면의 뚜껑을 뜯는다. 반복한다.
수십, 수백 번 몸을 섞고, ‘사랑’ 이란 말을 남발한 사이인 사람이 죽었음에도, 인간은 당장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다.
순간 양심이 찔려 구역질이 나온다. 하지만 배고픈 육체는 방금 몸속에 들어온 영양소를 절대 뱉지 않는다. 아니 뱉을 수 없다. 한참을 양심과 육체가 줄다리기한다.
먼저 힘이 빠진 쪽은 양심이었다. 곧바로 육체는 다시 음식을 몸속에 집어넣는다.
슬슬 배가 차오른다.
이때 음식을 씹으며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신이 있다면, 인간을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설계했을 리 없으니까.
아니면 이런 의구심을 유발시켜 신에게 기대게 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참 절망적인 세계관이다.
<여울의 여명>의 문장이 떠오른다. 프레스턴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 어딘가였다. 누군가와 마주친 프레스턴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기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이 애매한 표정을 알지 못했다. 이제는 보인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 이상이야.
때로는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탄하게 되지. 오늘 나는 그걸 깨달았어.
한 가지 물어볼게, 넌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자살은 자신만 죽는 게 아니야.
모든 인간은 사랑하고 이별하지만, 그 과정엔 중간 단계가 있어.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도, 여전히 ‘알던 사람’, ‘친한 사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잖아.
그래서 이별이 고통스러운 거야. 자살도 같아. 우린 아직… 그 사람과 이별하지 못했어.
나이가 많거나 혹은 병든 가족을 볼 때, 문득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게 돼.
젊은 사람에게는 그런 생각을 잘 안 하잖아. 천천히 과실이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준비를 해.
우리 모두는 이걸 알고 있으면서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고.
아, 혹시 자살한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봤다면, 내 얘기를 듣고 다시 생각해 봐.
넌 혹시 스스로 태어났니? 마치 신처럼 말이야.
태어남에 있어서, 스스로의 의지가 어디에 있었던 적이 있었나? 아니면 네가 신에게 빌어 세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니? 아마도 아닐 거야.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거든. 우리가 사는 별조차도.
인간은 스스로 태어나지 못해. 타인의 의지로… “우리 애나 가질까?”라는 말로 시작하는 게 우리라는 존재야.
태어난 ‘나’는 세상을 살아가, 때론 힘듦을 극복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지.
그런 과정에서 인생에서 한 가지 선택을 할 수 있게 돼. 바로 자살이야.
자살은 스스로 태어나지 않은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끝낼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야.
그렇다면 이제 누가 이기적이야? 스스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태어남을 부정하는 게 이기적인 걸까, 아니면 인생의 한 부분이 사라지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기적인 걸까.
내가 이기적으로 보인다면… 그 생각 또한 존중할게.
잘 있어, 날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아.
소설에서 이런 결말을 좋아했다.
주인공이 약간은 애매모호한 절망에 빠진다. 허우적거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마침내 포기하고 폐로 물이 들어와 뇌의 힘이 점차 빠지는 이야기.
때로는 절망을 헤쳐 나와 행복을 찾기도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이야기 자체의 재미와 의미가 남아 있으면 상관없었다.
아 소재는 로맨스가 가미되지 않을수록 좋다. 그래야 인간적이다. 사랑이 없어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달콤한 이야기는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이날만큼은 주인공이 뻔하디 뻔하게 행복한 결말을 맞았으면 좋겠다. 작은 바람이다.
나는 소설 쓰기를 좋아했다.
어쩌면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열정을 쏟았다. 온 힘을 다 했다.
하지만 내게 처음 사랑을 준 이의 죽음으로 그 행위를 멈췄다.
뜻밖의 사랑으로 다시금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소설을 쓸 수 없게 됐다.
문장의 끝은 또다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영혼이 메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