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87.
처음에는 이름이 있다.
낯섦, 불편함, 혹은 공포. 그러다 어느 날 그 이름이 사라진다. 남는 것은 동작뿐이다. 스틱을 움직이고, 줌을 당기고, 버튼을 누른다. 몸이 기억하면 머리는 쉬어도 된다. 그게 훈련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게 공범의 구조이기도 하다.
가장 무서운 악은 괴물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평범한 얼굴을 하고, 평범한 하루를 산다.
아침에 눈을 뜨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다. 출근길 신호등 앞에서 멈추고,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를 산다. 기지 정문을 지난다.
책상 앞에 앉고, 컴퓨터를 켜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오늘 할 일을 체크한다. 동료와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마신다.
점심을 먹는다. 이어지는 업무가 끝나면 퇴근한다. 저녁을 먹고, 잠이 든다.
내일도 같은 하루가 온다.
평범함 속에 악이 있다. 혹은, 악 속에 평범함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구별할 수 없다.
섞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처음부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에 알람이 울렸을 때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옅은 회색이었다. 해가 뜨기 전의 빛이었다.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면 공기가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손등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꿈치로 천천히 올라왔다. 한동안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침대 옆 바닥이 차가웠다. 슬리퍼를 찾아 신었다.
부엌을 지나면서 싱크대 위에 어젯밤 먹다 남긴 냉동 피자 용기가 놓여 있는 것을 봤다.
치우지 않았다. 욕실 문을 열었다. 타일 바닥이 차가웠다.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기까지 30초쯤 걸렸고, 그 사이 차가운 물이 어깨를 때렸다.
익숙한 차가움이었다. 물이 데워지면서 욕실 거울이 뿌옇게 흐려졌다. 거울 속 얼굴이 서서히 사라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수건에서 빨래 세제 냄새가 났다. 그것 말고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옷을 입었다. 군복은 벽에 걸어두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는 버릇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단추를 잠그고 허리띠를 맸다. 허리띠 가죽이 추위에 뻣뻣해져 있었다. 거울은 보지 않았다.
차 시동을 걸면 히터가 데워지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핸들이 차가워서 운전하면서 한 손씩 번갈아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조수석에 선글라스가 하나 놓여 있었다. 여자 것이었다. 치우지 않았다.
편의점에 들렀다. 문을 열 때마다 찬 바람이 들어왔다. 자동문 위의 센서가 딸깍하고 울렸다. 안쪽은 형광등이 밝았고, 냉장고 모터가 낮게 웅웅거렸다. 선반 위의 샌드위치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늘 고르던 햄 샌드위치를 집었다.
계산원은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여자였다. 바코드를 스캔하면서 잠깐 나를 봤다. 부은 눈이었다. 밤새 운 것 같기도 하고, 아침 근무가 힘든 것 같기도 했다. 시선이 금방 바코드 리더로 돌아갔다. 삑, 삑. 그 눈에 내가 잠깐 비쳤을 것이다.
“4달러 입니다.”
카드를 내밀었다. 단말기가 삑 울렸다. 영수증은 받지 않았다.
출근길은 항상 같았다. 같은 신호등, 같은 건널목, 같은 순서로 바뀌는 풍경. 도시를 벗어나면서 건물이 줄어들고 들판이 나타났다.
11월의 들판은 누렇게 말라 있었다. 여름에는 풀을 베고 남은 날카로운 냄새가 났지만, 지금은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마른 것들은 냄새가 없다.
바람이 불면 마른 풀이 한쪽으로 쏠렸다가 돌아왔다. 들판 가운데 전봇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고, 전선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까마귀 몇 마리가 전선 위에 앉아 있었다. 차가 지나갈 때도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기지까지 이어지는 40분 길 내내 그 풍경이 계속됐다. 라디오는 켜지 않았다. 엔진 소리와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밟는 소리만 차 안을 채웠다. 히터에서 나오는 바람이 발밑을 데웠지만, 핸들을 잡은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기지 정문을 지날 때 경비병이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창문을 내리자 찬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었다. 히터가 데워놓은 공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출입증을 보여주니 경비병이 확인하고 경례를 했다. 스물두셋쯤 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볼이 추위에 빨갛게 얼어 있었다. 나도 경례로 답했다. 차단기가 올라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다른 차들의 유리창에는 성에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엔진이 식어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똑, 똑, 똑. 금속이 수축하는 소리였다.
차에서 내리자 발밑의 자갈이 서걱거렸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짧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주차장 끝에 국기 게양대가 있었고,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줄이 쇠기둥에 부딪히는 딸깍딸깍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본관 건물까지는 약 2분 정도 걸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난방 때문에 공기가 달라졌다.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 코 안쪽이 약간 따끔거렸다. 복도는 길었고, 형광등 불빛이 바닥 타일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났다.
복도 벽에 게시판이 하나 있었다. 부대 행사 안내문과 교육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종이가 누렇게 바랜 것도 있었다. 아무도 떼지 않았다. 내 발소리만 복도에 울렸다. 가끔 다른 사람과 마주쳤고, 지나가며 경례를 주고받았다. 말은 없었다.
조종실 앞에서 출입증을 찍었다. 삑.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나고 빨간 불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문이 열렸다.
조종실은 넓지 않았다. 가로 6미터, 세로 4미터쯤. 벽면을 따라 책상 세 개가 놓여 있었고, 각 책상에 모니터 두 대와 조종 장비가 올라가 있었다. 창문은 없었다. 형광등만 있었다. 환기 팬이 천장에서 돌고 있었고, 방 한쪽 구석에 커피 포트와 종이컵, 설탕 봉지가 놓인 작은 선반이 있었다. 선반 위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과자 봉지가 하나 있었는데, 입구가 접혀 있었다. 며칠째 같은 상태였다.
마렌 중위가 벌써 와 있었다. 그는 항상 나보다 30분 일찍 왔는데, 이유를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나는 경례를 했다.
“출근했습니다.”
마렌이 경례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세 번째 책상이 내 자리였다. 나는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익숙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등받이 왼쪽이 조금 낮아서 앉을 때마다 몸이 약간 기울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기울기가 없으면 어색할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어제 쓰다 만 메모지가 한 장 있었다. 숫자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좌표였다. 생각해 보니 이걸 왜 적었나 싶었다. 메모지를 접어서 서랍에 넣었다. 비슷하게 접힌 메모지가 서랍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컴퓨터를 켰다.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웅웅거렸고, 부팅 화면이 떴다. 군 로고. “라바니안 국방부 무인기체계.” 로그인 창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열 자리. 대소문자와 숫자, 특수문자의 조합이었지만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었다. 엔터.
시스템이 열리는 동안 오늘의 작전 일지를 확인했다. 어제의 기록이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이상 없음.
이상 없음.
이상 없음.
...
같은 문장이 열두 시간 단위로 반복됐다. 야간 근무조가 남긴 기록도 같았다. 특이사항 없음.
“커피 마실래?”
마렌이 물었다.
“네, 감사합니다.”
마렌이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커피 포트로 가서 종이컵 두 개에 커피를 따랐다. 커피 포트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래된 포트였다. 바닥에 커피 자국이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포트 옆에 설탕 봉지가 있었지만 마렌은 쓰지 않았다. 나도 쓰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둘 다 블랙으로만 마셨다.
마렌이 내 책상 옆에 하나를 놓았다. 김이 올라왔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김이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고맙습니다.”
마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왼쪽 모니터에 지도가 나타났다. 국경선이 빨간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라바니안과 테르바키아의 경계. 그 선은 산맥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고, 군데군데 강이 흐르는 곳에서 꺾였다. 지도 위에 초록색 삼각형 몇 개가 표시되어 있었다. 아군 초소였다. 빨간 원은 지난주에 보고된 목격 지점이었다. 우리 담당 구역은 섹터 G-7이었다. 지도 위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사각형. 가로 20킬로미터, 세로 15킬로미터의 영역이었다.
오른쪽 모니터에는 드론 카메라 화면이 나타났다. 회색 땅, 약간의 굴곡, 몇 개의 바위. 어제 마지막으로 본 그 화면이었다. 밤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면 좌측 상단에 드론 상태가 표시되어 있었다.
[MQ-9B 고도: 1,200m 속도: 60km/h 연료: 78%]
책상 앞의 조종 장비를 잡았다. 두 개의 조이스틱이 달린 컨트롤러. 왼쪽 스틱은 고도와 회전, 오른쪽 스틱은 전후좌우 이동을 담당했다. 상단에 카메라 줌 다이얼이 있었고, 좌측 하단에 무장 선택 스위치, 좌측 상단에 안전장치 덮개가 달린 발사 버튼이 있었다. 양손에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오른손 검지가 닿는 부분의 플라스틱이 매끈하게 닳아 있었다. 처음에는 거칠었던 표면이었다.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비닐이 찢어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조종실 안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마렌이 잠깐 나를 봤지만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늘 그랬다.
한 입 베어 물었다. 햄에서 짠맛이 났다. 빵은 약간 눅눅했다. 편의점 샌드위치는 다 비슷한 맛이었다. 처음 여기 부임했을 때는 직접 빵을 사서 만들어 왔다. 토마토와 치즈를 넣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편의점 것을 샀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겁고 씁쓸했다. 인스턴트 커피 특유의 탄 맛이 혀 뒤쪽에 남았다.
오른쪽 스틱을 천천히 움직였다. 화면 속 땅이 움직였다. 바위, 덤불, 마른 나무. 11월의 국경 지대는 색이 없었다. 회색과 갈색 사이 어딘가. 가끔 바람에 덤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 속 세상은 소리가 없었다. 드론 카메라는 소리를 전송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도, 돌이 굴러도, 여기에는 아무 소리도 오지 않았다. 환기 팬 소리와 커피 포트의 지직거림만 있었다.
섹터 G-7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30분이 걸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보고서에 “이상 없음”을 입력했다.
08:47.
나는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베어 물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화면을 봤다. 천천히 씹었다. 삼켰다. 또 한 입.
마렌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섹터 F-6 정리.”
“네.”
그의 화면을 흘끗 봤다. 회색 땅만 보였다.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컨트롤러 스틱이 움직이는 작은 소리. 스틱이 중앙으로 돌아올 때 딸깍하고 걸리는 소리.
나도 천천히 구역을 이동했다. 화면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바위, 언덕, 작은 계곡. 계곡 바닥에 물이 조금 흐르고 있었다. 가을에 내린 비의 잔해 같았다. 계곡 옆으로 마른 나무 두어 그루가 서 있었다. 잎이 다 떨어져서 가지만 남아 있었다. 가지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줌을 살짝 당겼다. 새였다. 그것뿐이었다. 줌을 되돌렸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미지근해져 있었다. 종이컵을 책상 구석에 놓았다. 화면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먹었다. 씹는 동안에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습관이었다.
09:12.
화면 우측에 움직임이 포착됐다. 줌을 당겼다.
사람이었다. 남자 하나. 배낭을 메고 바위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가 다음 엄폐물로 재빨리 달렸다. 달리다 멈추고, 멈추다 달렸다. 훈련받은 움직임은 아니었다. 몸이 너무 높이 드러났고, 엄폐물 사이에서 뛰는 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고도를 낮췄다. 왼쪽 스틱을 아래로 밀었다.
600미터. 어깨가 보였다. 어두운 카키색 재킷. 배낭 끈이 어깨를 파고들어 재킷 천이 접혀 있었다. 어깨가 숨을 쉴 때마다 들썩였다. 재킷 왼쪽 소매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어딘가에서 넘어진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가끔 멈춰서 주변을 살폈고, 뒤를 계속 돌아봤다.
400미터. 손이 보였다. 바위를 짚을 때 손등이 드러났다. 마른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굵었고, 손등에 긁힌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섞여 있었다. 가시덤불에 긁힌 것 같았다. 배낭 끈을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톱 밑에 흙이 끼어 있었다. 배낭 옆에 물병 하나가 매달려 있었고, 걸을 때마다 물병이 흔들렸다.
200미터.
그 높이에서는 드론 소음이 들렸을 것이다. 프로펠러가 공기를 가르는 날카롭고 높은 소리. 남자가 갑자기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짧게 깎은 검은 머리카락에 며칠은 면도를 못 한 것 같은 거친 수염. 광대뼈가 뚜렷했다. 볼이 꺼져 있었다. 드론을 찾는 눈이었다. 하늘 이쪽저쪽을 훑다가 한 지점에서 멈췄다. 찾은 것이다.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전력 질주. 배낭이 등에서 크게 흔들렸다. 물병이 떨어졌다.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10미터까지 낮췄다.
남자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숨이 차서 입을 벌리고 있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렸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아침 공기가 차가운 모양이었다. 눈가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맺혀 있었다.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물을 오래 못 마신 것 같았다. 물병은 아까 떨어뜨렸다.
남자가 넘어졌다. 돌부리에 걸린 것 같았다. 배낭이 벗겨지며 땅에 나뒹굴었다. 배낭 지퍼가 열려서 안에 있던 것이 쏟아졌다. 옷가지 같은 것들이었다. 남자는 배낭을 보지 않았다. 양손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손바닥이 돌에 긁혔는지 찡그리는 표정이 보였다. 일어서려다 한쪽 무릎이 꺾이며 다시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섰다.
왼손 엄지로 안전장치 덮개를 열었다. 빨간 버튼이 드러났다.
사흘 전에 하달된 지시 사항이 있었다. 소형 유도탄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고 생산 공장 가동에 차질이 생겨서, 당분간 M134 기총 사용이 권장된다는 내용이었다. A4 한 장짜리 공문이었다. 중간에 번호가 매겨진 항목이 세 개 있었고, 마지막 항목은 탄약 절약에 관한 것이었다. 맨 아래에 “수고하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서명란에 직인이 찍혀 있었다.
오른손 검지로 버튼을 눌렀다.
짧고 둔탁한 연사음이 스피커를 통해 작게 들렸다. 조종실 안에서 들으면 그저 스피커의 잡음 같았다. 화면이 잠깐 흔들렸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남자가 쓰러졌다. 일어나지 않았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남자의 몸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았다. 재킷이 찢어져 있었다. 배낭이 1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까 쏟아진 옷가지들이 바람에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물병은 더 먼 곳에 굴러가 있었다.
드론을 다시 1,200미터로 올렸다. 왼쪽 스틱을 위로 밀었다. 화면 속 남자가 점점 작아졌다. 점이 됐다. 점도 아닌 것이 됐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모르면 그냥 돌이었다. 화면 속에 바위와 덤불과 마른 땅이 다시 펼쳐졌다.
조종실은 조용했다. 환기 팬이 돌고 있었다. 커피 포트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두 가지 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마렌의 자리에서 키보드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타건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보고서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마렌을 봤다. 마렌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키보드 위의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었다. 화면에 글자가 채워지는 것이 보였다. 형광등 불빛이 그의 옆얼굴에 닿아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 있었다. 종이컵 옆면에 입술 자국이 남아 있었다.
보고서를 입력했다. 시간, 좌표, 대상, 결과. 네 개의 칸을 채우는 데 30초가 걸렸다. 대상란에 “성인 남성 1”이라고 썼다. 엔터를 눌렀다. 화면이 다시 회색 땅으로 돌아왔다. 환기 팬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까부터 계속 돌고 있었을 텐데, 그 사이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음 섹터로 이동했다. 오른쪽 스틱을 천천히 밀었다. 화면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회색 땅이 지나갔다. 아까 본 것과 같은 바위, 같은 덤불, 같은 색의 땅이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짠맛이 더 강하게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