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92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단어가 다르면 사건이 달라진다.
아침에 알람이 울렸다. 어두운 방.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이 차가웠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샤워를 했다. 차가운 물이 먼저 나왔다. 익숙했다.
군복을 입었다. 단추를 잠그고 허리띠를 맸다.
차에 탔다. 조수석에 선글라스가 놓여 있었다. 며칠 전보다 먼지가 더 쌓인 것 같았다. 렌즈 위로 빛이 지나갈 때 먼지가 보였다. 한 번도 닦지 않았다. 시동을 걸었다. 히터가 데워지기를 기다렸다.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들판이 지나갔다. 마른 풀, 전봇대, 까마귀. 까마귀는 오늘도 같은 전선 위에 앉아 있었다. 같은 까마귀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자리였다. 기지 정문에서 경비병이 출입증을 확인했다. 차단기가 올라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엔진을 껐다. 똑, 똑, 똑.
조종실에 들어갔다. 마렌이 이미 와 있었다. 경례. 수고. 커피. 컴퓨터를 켰다. 화면에 어제와 같은 지도가 떴다. 같은 국경선, 같은 섹터. 컨트롤러를 잡았다. 오른손 검지가 닳은 자리에 닿았다. 커피를 마셨다. 화면을 봤다.
오전 내내 아무것도 없었다. 구역을 돌고, 보고서를 쓰고, 커피를 마시고, 화면을 봤다. 바위와 덤불과 마른 땅이 지나갔다.
오후에 두 건이 있었다.
움직임이 포착됐고, 줌을 당겼고, 확인했고, 검지를 눌렀다. 보고서를 입력했다. 시간, 좌표, 대상, 결과. 마렌은 돌아보지 않았다. 세 건째가 있었다. 같은 절차였다. 시간, 좌표, 대상, 결과. 세 명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가 사라졌다.
그 사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짠맛이 났다.
앵커는 40대쯤 돼 보이는 남자였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있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얼마나 화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어떤 단어에 힘을 주고, 어떤 단어를 낮추는지가 계산되어 있었다.
“오늘 오전, 라바니안 국경 인근에서 드론 공격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해 민간인 다수가 사망했습니다. 유엔 난민기구는 이번 달 들어 세 번째 공식 성명을 발표하며 즉각적인 실태 조사를 요구했고, 비상임이사국 다수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 소집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다만 외교 전문가들은 미국과 러시아의 절차적 반대로 의제 채택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한편 라바니안 의회에서는 오늘 전쟁 종료 결의안을 두고 여야가 격론을 벌였으나 표결에서 부결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유엔 난민기구 제네바 사무소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이었다. 건물 뒤로 제네바 호수가 보였다. 바람이 불고 있었는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마이크가 여러 개 꽂혀 있는 연단 앞에 기자들이 서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준비된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목소리는 안정적이었다. 이런 자리에 여러 번 서본 사람의 목소리였다.
“저희는 지난 6주간 해당 지역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토대로 이번 사건을 포함한 일련의 사태가 국제인도법상 보호 대상인 민간인에 대한 무력 사용에 해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라바니안에게 자료 제출과 현장 접근 허용을 재차 요청합니다.”
원고를 덮었다. 질문을 기다렸다.
기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라바니안 정부가 접근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데, 안보리 차원의 압박은 가능합니까?”
남자가 잠시 멈췄다. 안경을 고쳐 썼다.
“안보리 긴급회의 소집 요청이 이미 제출된 상태입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안보리의 구조상, 특정 이사국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당사국이 관련된 사안은 의제 채택 단계에서부터 난항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로서는 외교적 경로를 통해 계속 요청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손에 들린 원고가 가지런했다. 마이크 앞에 선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음 질문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화면이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앵커가 원고를 넘겼다. 다음 뉴스로 넘어갔다. 날씨 예보. 내일도 추울 것이라고 했다.
같은 날, 한 가게에서는 라바니안의 뉴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채널이 달랐고, 앵커가 달랐고, 배경 세트의 색이 달랐다. 하지만 앵커의 넥타이는 단정했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각도는 같았다.
“국민 여러분께 당부 말씀을 드립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분노 대신 걱정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쟁 중인 테르바키아 무장 세력이 국경을 통해 지속적인 침투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정보 당국은 이들 중 일부가 민간인으로 위장해 내부 교란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국경 인근 주민 여러분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국경 인근 지역 주민께서는 신원 불명의 외국인을 발견할 경우 즉시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침묵.
“우리 군은 여러분을 지키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는 자들을 돕는 행위는 이적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화면이 꺼졌다. 혹은 누군가가 껐다. 혹은 보는 사람이 채널을 돌렸다.
라바니안에서는 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의회 본회의장의 천장은 높았고, 벽에 국기가 걸려 있었다. 좌석은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의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일부는 원고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옆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뒤쪽 좌석에서는 스마트폰을 보는 의원도 있었다. 방청석에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앉아 있었다.
한 의원이 연단에 섰다. 원고를 펼쳤다. 안경을 쓰고 있었다. 손이 약간 떨리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이 전쟁은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난민을 죽이고 있습니다. 안보리까지 나선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살인을 멈추는 것입니다.”
한쪽 의원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다른 쪽은 조용했다.
다음 의원이 연단에 올랐다. 원고를 펴지 않았다. 마이크를 잡고 의원석을 천천히 둘러봤다.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양복 단추가 하나 풀려 있었다.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편안해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전시에 국경을 지키는 것은 주권국가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동료 의원들께서는 지속적인 침투를 감행하는 무장 세력 사이에 우리 국민을 해칠 자가 섞여 있을 가능성을 편의상 생략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잠깐 멈췄다.
“순진하신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시는 건지는 제가 판단하기 어렵군요.”
한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민을 우롱하는 겁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안에서 박수와 야유가 동시에 터졌다. 한쪽 의원석에서 누군가 서류를 든 손을 들어 흔들었다. 반대편에서는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탁, 탁, 탁.
두 박수 소리는 비슷하게 컸다. 의사봉 소리만 달랐다. 의장이 한 번 더 두드렸다. 탁. 소리가 잦아들었다. 완전히 잦아들지는 않았다.
저녁 뉴스가 의회 상황과 함께 하루의 전황을 전했다.
“오늘 본회의에서는 전쟁 종료 결의안을 두고 여야가 격론을 벌였습니다. 결의안은 표결 끝에 부결됐으며, 의회 밖에서는 종전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전쟁 지속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동시에 집회를 열었습니다. 종전을 요구하는 측은 의회 정문 앞에, 지지하는 측은 건너편 도로에 각각 집결했으며 경찰이 양측 사이에 이중 차선을 두고 대치 상황을 관리했습니다. 두 시위대의 규모는 비슷했습니다.”
앵커가 원고를 넘겼다.
“한편 국방부 대변인은 오늘 하루 국경 인근에서 침투 시도자 31명을 사살했다고 밝혔습니다. 민간인 피해는 없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앵커가 다음 페이지를 봤다. 같은 문장이 한 번 더 적혀 있었는지, 혹은 중요해서 한 번 더 읽으라고 표시가 되어 있었는지, 같은 말을 한 번 더 했다.
“민간인 피해는 없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같은 시각, 온라인에서는 다른 숫자가 돌고 있었다. 뉴스가 나간 지 두 시간 만에 댓글이 천 개를 넘었다.
[뉴스 댓글창] 국방부 “오늘 침투 시도자 31명 사살” | 댓글 1,247개
sunlight**** 수고 많으십니다 진심으로 ⬆ 1,823 ⬇ 41
morningrun**** 세금 제대로 쓰이네 ⬆ 967 ⬇ 28
quieteve**** 31명이요. 31명. 살인도 숫자로 쓰니까 쉽네요. ⬆ 312 ⬇1,045
ㄴ sunlight**** 불법 침입자한테 무슨 감정이입이야 ⬆ 892 ⬇ 67
ㄴ quieteve**** 사람이잖아요 ⬆234 ⬇ 788
ㄴ sunlight****ㅇㅇ 신고함 ⬆445 ⬇ 23
zkdpfdjaa**** 우리 아들도 저기 있는데. 자랑스럽습니다. ⬆ 2,134 ⬇ 9
justasking**** 저 사람들 왜 계속 넘어오는 거임? 진짜 궁금해서 ⬆1,567 ⬇ 89
ㄴ coldbrewday**** 저쪽이 지옥이라 그럼 ⬆678 ⬇ 234
ㄴ justasking**** 그럼 우리가 다 받아줘야 함? ⬆ 890 ⬇312
ㄴ coldbrewday**** 이새끼 이미 알고 있는데? ㅋㅋ ⬆1,023 ⬇ 45
리트윗 4,231회. 좋아요 8,904개.
latenight**** 솔직히 난민들 불쌍하긴 한데...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ㅠ 국가가 우선 아니냐 ♥ 445
ㄴ greenfield**** 사람 목숨이 우선이지
ㄴ latenight**** 그럼 니가 돈 내서 다 받아줘 말은 쉽지
ㄴ greenfield**** 억지 ㄴㄴ
ㄴ latenight**** 테르바키아 무장 단체 어서오고 ㅋ
조회수 120만.
ironbird**** 드론 스펙 진짜 대단하다 ♥ 1,876
ㄴ plainview**** 이거 살인 기계잖아 뭘 자랑하냐 ♥ 234
ㄴ ironbird**** 빨갱이 신고 ㄱㄱ ♥ 500
점심시간이었다.
토루빈이 조종실 밖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내가 나오자 화면을 내렸다. 화면에 뉴스 기사 제목이 잠깐 보였다. 글자가 빨간색이었다. 속보였는지, 아니면 그냥 그런 디자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국회에서 전쟁 종료 결의안 표결 갔다가 부결됐대.”
“항상 그러잖아.”
“이번엔 좀 크게 붙었던 것 같던데.”
복도를 걸으며 토루빈이 다시 말했다. 복도 바닥에 두 사람의 군화 소리가 울렸다.
“안보리 또 날아갔나 봐. 유엔 사무총장이 유감 표명했다고 하더라.”
“유감은 오늘 점심이 유감이고 시발.”
토루빈이 식당 문을 열면서 안을 들여다봤다.
“또 그 수프야? 녹슨 쇠 맛 나는 거.”
내가 웃었다.
트레이에 빵과 수프를 올렸다. 자리에 앉았다. 식당은 넓었고, 군인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다들 먹고 있었다. 포크와 숟가락이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 의자가 끌리는 소리, 낮은 대화 소리가 섞여서 하나의 소음이 됐다. 창밖으로 주차장이 보였다. 11월의 빛이 낮게 들어와 테이블 위를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수프에서 김이 올라왔다. 빛이 김을 통과하면서 작은 입자들이 보였다.
토루빈이 맞은편에 앉아 빵을 뜯었다. 버터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소금이라도 달라고 했다. 내가 소금통을 밀어줬다.
“고마워.”
나는 수프를 떴다.
수프를 떴다. 짠맛이 났다. 그게 전부였다.
토루빈이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 댓글창을 보고 있었다. 화면을 스크롤하면서 가끔 피식 웃거나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화면 빛이 비쳤다.
“사람들 진짜 대단해. 다 전문가야.”
“뭐래?”
“드론 스펙 자랑하는 놈도 있고, 신고한다는 놈도 있고.”
나는 수프를 한 숟가락 더 떴다. 이번에도 역시 같은 짠맛이었다. 그 안에 다른 맛을 느껴보려 순간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식감에 집중했다. 당근이 들어 있었고, 감자도 있었다. 하지만 숟가락 위에서는 전부 같은 맛이었다. 빵을 찢어 수프에 적셨다. 빵이 수프를 빨아들여 무거워졌다. 입에 넣고 삼켰다. 토루빈이 맞은편에서 빵을 수프에 적시지 않고 따로 먹고 있었다. 마른 빵을 씹으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토루빈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31명이래.”
“뭐가.”
“오늘 사살자, 국방부가 그렇게 발표했네.”
나는 수프 그릇을 비우고 빵 부스러기를 트레이에 떨었다.
“그중에 셋은 나야.”
토루빈이 잠깐 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프를 한 숟가락 더 떴다가 그릇에 도로 내려놓았다. 트레이를 들고 일어났다.
“가자.”
트레이를 반납했다. 반납대에 트레이가 쌓여 있었다. 다른 군인들의 트레이. 다른 수프 그릇, 다른 빵 부스러기. 식당 문을 나서자 복도의 건조한 공기가 다시 코 안쪽을 찔렀다. 토루빈이 복도에서 멈추더니 말했다.
“나 담배 한 대 피우고 갈게.”
“어.”
토루빈이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조종실로 돌아갔다. 출입증을 찍었다. 삑. 마렌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커피 포트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의자에 앉았다. 삐걱. 컨트롤러를 잡았다. 화면에 회색 땅이 있었다.
오후가 시작됐다.
업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다. 차에서 내릴 때 해가 이미 져 있었다. 11월의 해는 4시 반이면 기울기 시작했다. 주차장이 어두웠다. 가로등 하나가 깜박이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었다. 거실에 불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잠깐 그냥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 가구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냉장고의 모터 소리만 부엌에서 들렸다. 보일러를 켰다. 바닥이 데워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물병을 꺼내 마셨다. 찬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냉장고를 닫았다.
TV를 켰다. 화면의 빛이 거실을 채웠다. 소파에 앉은 내 무릎 위로 화면 속 색이 번졌다.
시사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진행자가 오늘 의회 표결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야가 또다시 언어 싸움에 머물렀다는 내용이었다. 본질은 외면한 채 단어만 골랐다는 내용이었다. 그 진행자도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얼마나 화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테르바키아 앵커와 같은 종류의 목소리. 나라가 다르고 말이 달라도 그 목소리는 같았다.
“...다음 뉴스입니다. 올 겨울 난방비가 전년 대비 평균 18퍼센트 인상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서민 가계에 상당한 부담이 예상되며...”
채널을 돌렸다.
화면이 바뀌었다. 한 초등학교 교실이었다. 아이들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카메라가 천천히 교실을 훑었다. 작은 손들이 연필을 잡고 있었다. 책상 위에 색연필이 흩어져 있었다. 교실 뒤쪽 게시판에 그림이 붙어 있었다. 군인 그림, 비행기 그림, 태극기 그림. 밑에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따뜻한 소식입니다. 한 초등학교에서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감사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담당 교사가 인터뷰에 응했다.
“아이들이 직접 쓴 편지입니다.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카메라가 한 아이의 편지에 멈췄다.
저는 커서 군인이 될 거예요. 아저씨들처럼 나라를 지키고 싶어요.
글씨가 삐뚤었다. 군인의 군 자가 조금 큰 편이었다. 편지지에 태극기 비슷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가 웃고 있었다.
채널을 돌렸다.
드라마가 나왔다. 남녀가 카페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자가 웃었다. 남자가 뭔가 말했다. 여자가 또 웃었다. 카페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짜 눈 같았다. 너무 하얗고 너무 고르게 내렸다. 드라마 속 사람들은 전쟁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세계에는 국경도 드론도 없었다. 커피를 마시고 웃고 우산을 같이 쓰고 걸었다.
계속 틀어놨다.
소파에 누웠다. 쿠션이 등 뒤에서 눌렸다. 바닥이 데워져 있었다. 발밑으로 온기가 올라왔다. TV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드라마 속 사람들이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했다.
TV에서 드라마 엔딩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음 프로그램 예고가 나왔다. 내일의 뉴스를 예고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도 같은 뉴스가 나올 것이다. 같은 숫자, 같은 단어, 같은 댓글. 눈이 감겼다.
TV가 켜진 채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