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_라디오가 계속 흘렀다.

D+502

by 이아진 leeA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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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502 (아침).



안드레이는 5시에 눈을 떴다.


알람보다 10분 빠른 시각이었는데, 이 10분이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몰랐다. 딸이 떠나고 나서부터인 것 같기도 했고, 아내가 죽고 나서부터인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을 수도 있었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부터였을 수도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잠이 줄어든 것도 그중 하나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창밖이 아직 어두웠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쪽을 보는 습관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이불이 그쪽에서 접혀 있었다. 접은 적이 없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접어놓은 그대로였다.


천장을 봤다. 금이 가 있었다.


작년부터 있던 금이었는데, 처음에는 머리카락만큼 가늘었던 것이 지금은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큼 벌어져 있었다. 겨울이 오면 그 틈으로 찬 바람이 들어올 것이고, 고치려면 관리사무소에 신청해야 하고, 신청하면 대기 번호를 받고, 대기 번호가 불리면 담당자를 만나고, 담당자가 실사를 나오고, 실사 후에 승인이 나면 수리 일정을 잡는다. 작년에 신청했다. 아직 연락이 없었다.


알람이 울렸다. 껐다.


일어나서 슬리퍼를 신었다. 항상 침대 왼쪽에 있었고, 항상 왼쪽에서 신었다. 슬리퍼 밑창이 얇아져서 바닥의 차가움이 전해졌다. 부엌으로 가면서 전등 스위치를 눌렀더니 형광등이 한 번 깜빡이고 켜졌다. 오래된 등이었다. 교체 신청도 해놨었다. 배급과 마찬가지로 아직 연락이 없었다.


선반 위에 이번 달 배급 봉투가 놓여 있었다. 어제 구역사무소에서 받아온 것인데, 줄이 길어서 45분을 기다렸다. 구역사무소 벽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전쟁 전에는 없던 포스터였다. 승리와 인내에 대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드레이는 읽지 않았다. 줄 앞에 선 노인이 배급 담당자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소금이 빠졌다고 했다. 담당자가 올해부터 소금이 줄었다고 했다. 노인이 왜 줄었냐고 물었다. 담당자가 공급 사정이라고 했다. 노인이 더 말하려다가 뒤에 줄이 길어지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딸이 떠나고 나서 1인분으로 줄었고, 봉투도 그만큼 작아졌다. 오트밀 450그램, 식용유 소병 하나, 소금. 이번 달은 소금이 작년보다 적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오트밀을 계량컵으로 덜어 넣었다. 물이 끓는 동안 작업복을 입었다. 회색이었는데, 세탁을 워낙 많이 해서 원래 색이 뭔지 잘 몰랐다. 단추를 위에서 아래로 채웠다. 세 번째 단추가 실이 닳아 있었지만, 오늘은 괜찮을 것이었다. 내일도 괜찮을 것이었다. 어느 날 떨어질 것이고, 그때 꿰매면 됐다.


라디오를 켰다. 정각 5시 30분 방송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의 날씨입니다. 서부 전선 인근 지역은 오전 중 흐리겠으며 오후부터 기온이 떨어질 예정입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외출 시 방한 준비를...


뉴스가 이어졌다. 국경 지역에서 적의 드론 공격이 계속되고 있으며, 민간인 피해가 늘고 있다는 보도였다. 우리 정부는 국제사회에 즉각적인 개입을 촉구하고 있으며, 적국의 무차별 공격에 강력히 항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적국. 라디오에서는 항상 그렇게 불렀다.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오트밀을 저으면서 시계를 봤다. 3분이 됐다. 불을 끄고 그릇에 담았다. 식탁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라디오가 계속 흘렀다.


국경 안전지대 내 불법 이동 시도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됩니다. 허가증 없는 이동은 국가보안법 7조에 의거하여...


안드레이는 라디오를 껐다. 딸이 떠올랐다.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떠올랐다. 불법 이동 시도자. 딸이 그것이었다. 안드레이는 알고 있었다.


오트밀을 먹었다. 맛은 없었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트밀이었는데, 매일 먹으면 그냥 그렇게 됐다. 전쟁 전에는 달걀을 넣어 먹었다. 아내가 살아 있었을 때는 오트밀에 건포도를 넣어줬다. 지금은 오트밀만 먹었다.


그릇과 냄비를 씻고 물기를 닦은 뒤 가방을 챙겼다.


출입증이 앞주머니에 있었다. 확인했다. 통행증도 확인했다. 통행증은 이달 것으로 갱신해놓은 것인데, 매달 초에 구역사무소에 가서 갱신해야 했고, 이것 없이는 공장 구역을 지날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생긴 절차였는데, 처음에는 번거로웠고 이제는 그냥 확인하는 것이었다. 확인하지 않으면 검문소에서 세워지고, 세워지면 시간이 걸리고, 시간이 걸리면 지각이고, 지각하면 보고서가 작성되고, 보고서가 쌓이면 배급에 영향이 갔다. 그래서 확인했다.


문을 잠갔다. 위 자물쇠, 아래 자물쇠. 둘 다 잠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쇠 손잡이였다. 10월의 온도가 그대로 전해졌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겨울이 이른 편이었다. 숨을 내쉬면 입김이 희미하게 보였다.


왼쪽 빵집은 아직 문이 닫혀 있었는데, 7시에 열었고 안드레이가 지나가는 시각에는 항상 닫혀 있었다. 전쟁 전에는 6시에 열었다. 밀가루 공급이 줄어서 영업 시간이 짧아졌다.


냄새는 났다. 빵 굽는 냄새가 벽 너머로 새어 나왔고, 그 앞을 지나갈 때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다. 매일 그랬다. 빵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었지만 배급 외의 지출은 기록됐다. 기록이 쌓이면 불이익이 올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소문인지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빵을 사지 않았다. 냄새만 맡았다.


검문소에서 통행증을 꺼냈다. 군인이 받아서 얼굴을 보고 통행증을 보고 도장을 찍어 돌려줬다. 군인은 젊었다. 스물 초반쯤. 총을 메고 있었다.


공장에 도착해서 카드를 찍었다. 삑 소리가 났다. 라커룸에서 헬멧과 보안경을 꺼내 자리로 갔다. 공장 안은 따뜻했다. 기계 열기 때문이었다. 밖과 다른 공기였다. 기름 냄새와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가 컸다. 웅웅거리는 소리, 딸깍거리는 소리,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이 소리들 안에 있으면 생각이 줄어들었다. 그것이 공장의 좋은 점이었다.



부품이 흘러왔다. 표면을 봤다. 이상 없으면 상자에, 이상 있으면 옆 바구니에. 다음 부품이 왔다. 표면을 봤다. 상자에 넣었다. 부품은 금속이었다. 뭘 만드는 부품인지는 알지 못했다. 15년 동안 같은 부품을 검사했지만 이 부품이 어디에 쓰이는지 설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안드레이도 묻지 않았다.


그 사이에 손가락이 리듬을 만들었다. 잡고, 뒤집고, 보고, 놓고. 15년 동안 같은 리듬이었다. 이 리듬이 있는 동안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천장의 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전 내내 그렇게 했다.





점심 시간에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수프와 빵과 삶은 감자. 수프 위에 기름이 떠 있었다. 감자는 작았다. 모든 것이 작아지고 있었다.


옆에 빅토르가 앉았다. 같은 라인에서 15년을 같이 일한 사람이었는데, 특별히 친한 건 아니었고 그냥 15년 동안 옆자리였다. 빅토르는 머리가 희끗했고 손이 컸다. 안드레이보다 다섯 살 많았다.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군대에 갔다. 식판을 내려놓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딸한테 연락 왔어?” 빅토르가 물었다.


“아니.”


“잘 지내고 있겠지.”


“그러겠지.”


빅토르가 빵을 뜯었다. 수프에 적셔서 먹었다.


“서쪽 검문이 늘었다던데.”


“그래?”


“국경 쪽으로 가는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가 봐. 드론이 더 떴다는 얘기도 있고.”


안드레이는 수프를 떴다. 드론.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딸 생각이 났다. 딸은 국경 쪽으로 갔다. 드론이 떠 있는 쪽으로. 안드레이는 숟가락을 내려놓지 않았다. 내려놓으면 빅토르가 알아챌 것이었다.


“뭐, 별일 있겠어.”


수프를 먹었다. 짠맛이 났다. 매일 짠맛이었는데, 처음에는 짜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그냥 수프 맛이었다.


“딸이 허가증은 받았대?” 빅토르가 물었다.


안드레이는 잠깐 있었다. 허가증은 반려됐다. 딸은 허가증 없이 갔다.


“…”


빅토르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안드레이도 더 말하지 않았다. 식당 안이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식판 부딪히는 소리, 국자가 냄비에 닿는 소리. 그 안에서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후에 다시 자리에 섰다. 부품이 흘러왔다. 잡고, 뒤집고, 보고, 놓고. 같은 리듬. 오후 3시쯤 부품 모서리에 손가락이 긁혔다. 얕은 상처였고, 피가 조금 맺혔다. 장갑을 벗어서 닦고 다시 꼈다. 피가 장갑 안쪽에 묻었다. 계속 했다. 부품이 흘러왔다. 잡고, 뒤집고, 보고, 놓고.


6시에 기계가 멈췄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멈추면 귀가 울렸다. 웅웅거리는 잔향이 한동안 남았다.


라커룸에서 헬멧과 보안경을 벗었다. 얼굴에 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었는데, 매일 남았다. 이마에 헬멧 자국, 눈 주위에 보안경 자국. 세면대에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고 수건으로 닦았다. 거울은 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어두워져 있었다. 6시에 이미 어두웠다. 10월이 그랬다.


돌아오는 길에도 검문소를 지났다. 통행증을 꺼내고 도장을 받고 가방에 넣고 계속 걸었다. 아침에 봤던 군인은 교대했는지 다른 얼굴이었다. 이 군인도 젊었다. 총을 메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불을 켰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이고 켜졌다. 아침과 같은 깜빡임이었다. 작업복을 벗었다. 세 번째 단추가 오늘도 버텼다. 내일도 버틸 것이었다. 혹은 내일 떨어질 것이었다. 작업복을 의자에 걸었다. 내일 다시 입을 것이었다. 세탁은 주말에 했다. 물이 주말에만 충분했다. 평일에는 아침과 저녁에만 물이 나왔다.


냉장고에서 어제 남은 빵을 꺼내 식탁에 앉아 먹었다. 빵이 딱딱했다. 물에 적셔서 먹었다. 물을 마셨다. 찬물이었다. 식탁 위에 배급 봉투가 놓여 있었다. 오트밀이 조금 남아 있었다. 내일 아침에 먹을 것이었다. 모레 아침에도 먹을 것이었다. 봉투가 빌 때까지.


창가에 서서 창밖을 봤다. 가로등이 깜빡이고 있었는데, 아침에도 깜빡이고 있었고 아무도 고치지 않았다. 전쟁 전에는 고장 나면 이틀 안에 교체됐다. 지금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도시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씩 고장 나고, 간판이 하나씩 꺼지고, 약국이 문을 닫고, 빵집의 영업 시간이 줄어들었다. 느린 속도였다. 하루에 하나씩 줄어드는 것은 알아채기 어려웠다. 1년이 지나면 보였다.


건너편 건물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누군가 밥을 먹고 있었다. 혼자인지 가족과 함께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TV가 켜져 있는 창문도 있었고, 파란 빛이 깜빡였다. 뉴스를 보고 있을 것이었다. 전쟁 뉴스. 드론 뉴스. 민간인 피해 뉴스. 저쪽에서는 우리를 침투자라고 불렀다. 이쪽에서는 난민이라고 불렀다. 딸 생각이 났다.


마지막으로 본 날, 딸이 현관에 서 있었다.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배낭에 물병이 매달려 있었고, 어머니 장갑을 끼고 있었다. 어머니 것이라 딸의 손에는 컸고, 손가락 끝이 헐렁했다. 딸의 얼굴은 단단해 보였다.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혹은 두려움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배낭이 작았다. 옷 몇 벌과 빵과 물이 전부일 것이었다. 안드레이가 마지막에 빵을 한 조각 더 넣어줬다. 딸이 받아서 넣었다. 배낭 지퍼가 잘 안 잠겼다. 두 번 당겨서 닫았다.


“일자리 찾으러 간다.” 딸이 말했다.


허가증 신청을 했지만 반려됐고, 서류가 부족하다고 했고, 어떤 서류인지 물었더니 창구가 닫혔고, 다음 날 다시 갔더니 담당자가 바뀌어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했다. 세 번째 갔을 때는 접수 자체가 중단되어 있었다. 전시 상황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문 옆에 승리와 인내에 대한 포스터가 또 붙어 있었다. 딸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기다리면 영원히 기다릴 수도 있었다. 이 나라에서 기다리면 영원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천장의 금처럼. 형광등 교체처럼. 가로등 수리처럼.


“조심해라.”


안드레이가 말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가지 마라,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 여기에 남아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안드레이도 알고 있었다. 배급을 받고, 검문소를 지나고, 부품을 검사하고, 오트밀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었다. 딸에게 그것을 시킬 수 없었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다르게 말했을 수도 있었다.


딸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작아졌다. 사라졌다. 현관문이 아래층에서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올라왔다. 그 뒤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안드레이는 현관에 서 있었다. 문을 닫지 않고 서 있었다. 한동안. 계단 아래를 봤다. 딸이 이미 없었다. 문을 닫았다. 위 자물쇠, 아래 자물쇠. 둘 다 잠갔다.


그게 몇 주 전이었다.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가로등 빛이 차단됐다. 방이 어두워졌다. 침대에 누웠다. 이불이 차가웠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천장을 봤다. 금이 가 있었다. 커지고 있었다. 고칠 수 없었다. 이 방에서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형광등도, 천장도, 옆자리도.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현관에 서 있던 얼굴. 배낭을 메고 있던 얼굴. 단단해 보이던 얼굴. 그 얼굴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풀밭에 있는지. 검문소 앞에 있는지. 철조망 앞에 있는지. 혹은 이미 넘었는지. 혹은.


안드레이는 그 생각을 멈추려고 했다. 멈출 수 없었다. 매일 저녁 같은 생각이었다.


내일도 공장에 간다. 5시에 눈을 뜨고, 검문소를 지나고, 자리에 선다. 기계가 돌아간다. 부품을 검사하고 상자에 넣는다. 세 번째 단추가 버틴다. 오트밀을 먹는다. 라디오를 켰다가 끈다. 매일 같은 하루가 온다.


딸은 지금쯤 어디쯤 걷고 있을 것이다. 헐렁한 장갑을 끼고. 물병을 달고. 어딘가의 풀밭에 엎드려 있을 수도 있었다. 안드레이는 그것을 몰랐다.


잠이 왔다.






D+502 (저녁).



국경에서 동쪽으로 4킬로미터.


야안나는 풀 사이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풀이 얼굴에 닿아 있었다. 풀잎 끝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차가웠다. 10월의 밤이슬이었다. 풀 냄새와 흙 냄새가 코를 채웠다. 풀밭이 넓었다. 어디까지가 풀밭이고 어디부터가 완충지대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베르나가 그려준 지도에는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점선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풀밭이었다. 같은 풀밭인데 이쪽은 자기 나라이고 저쪽은 적국이었다.


숨을 참았다. 숨을 참으면 심장 소리가 들렸다. 심장 소리가 들리면 더 무서웠다. 그래도 참았다. 배가 땅에 눌렸다. 불편했다. 엎드리면 항상 불편했는데, 요즘 더 불편해졌다. 배와 땅 사이에 공간이 없었다. 자세를 바꿀 수 없었다. 움직이면 안 됐다. 풀이 흔들리면 안 됐다. 풀이 사람 때문에 흔들리는 것과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것은 다르다고 들었다. 사람이 흔들면 한 곳만 흔들린다. 바람이 흔들면 전부 흔들린다. 하늘에서 보면 그 차이가 보인다고 했다.


바람이 불었다. 풀이 흔들리고,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배낭 옆에 달린 물병이 풀에 닿아 소리가 날 뻔했다. 손으로 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앞에 철조망이 있었다.


100미터쯤. 철조망 너머가 완충지대였고 완충지대를 건너면 그쪽이었다. 그쪽. 전쟁 중인 나라. 적국이라고 라디오에서 불렀던 나라. 그 나라가 드론을 띄우고, 우리들을 죽이고 있었다. 뉴스에서 매일 나왔다. 민간인 피해. 무차별 공격. 그 나라로 넘어가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았다. 이쪽에서는 살 수 없었으니까. 지도에서 봤을 때는 단순했다. 선 하나. 이쪽과 저쪽. 이쪽이 지옥이면 저쪽도 지옥일 수 있었다. 그래도 갔다. 다른 지옥이라도 갈 수밖에 없었다.


왼쪽 어딘가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었을 것이다. 짐승이었을 것이다. 계속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바람이다. 짐승이다. 사람이 아니다. 드론이 아니다.



출발한 건 어제 저녁이었다. 베르나라는 여자한테서 경로를 샀는데, 가진 돈의 절반을 줬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줬다. 도로를 피해서 걸어야 하는 길. 빨간 점이 찍힌 곳은 검문소였고, 검은 선으로 그어진 곳은 절대 지나지 말라는 곳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밤에만 움직여. 낮에는 풀밭에 엎드려 있어. 하늘에서 보고 있어. 하늘에서 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야안나는 웃을 뻔했다. 미친 이야기 같았다. 하늘에서 사람을 본다는 것이. 지금은 웃기지 않았다. 그 종이가 지금 주머니 안에 있었다. 땀에 젖어 있을 것이었다.


밤새 걸었다. 발이 아팠다. 신발이 맞지 않았다. 출발할 때는 괜찮았는데 걷다 보니 발가락이 부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괜찮다가 저녁이 되면 부었다. 허리도 아팠다. 요즘 허리가 자주 아팠다. 무거운 것을 들지 않아도 아팠다. 몸이 무거워진 것 같았다. 몸의 중심이 달라진 것 같았다.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예전에는 이 정도 거리를 걸으면 힘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숨이 빨리 찼다. 쉬는 횟수가 잦아졌다. 배낭 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앞으로 숙이면 배가 눌려서 불편했다. 뒤로 젖히면 허리가 아팠다. 어떤 자세도 편하지 않았다.


장갑 낀 손이 땀에 젖었다. 어머니 장갑이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서랍에 넣어뒀던 것인데, 왜 챙겼는지 몰랐다. 그냥 챙겼다. 어머니 손은 작았다. 야안나의 손도 작았다. 그래서 맞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목이 뻣뻣했다. 오래 엎드려 있어서. 허리를 조금 들었다가 다시 낮췄다. 아팠다. 어깨가 뻣뻣했다. 배낭 끈이 어깨를 파고들고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안에 남은 음식과 물과 돈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마지막에 넣어준 빵 한 조각. 이미 굳어 있을 것이었다.


철조망 쪽을 봤다. 어두웠다. 달이 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가드등이 두 개 보였다. 하나는 켜져 있었다. 하나는 꺼져 있었다. 경로를 알려준 여자가 말한 대로였다. 꺼진 쪽으로 가면 된다고 했다. 꺼져 있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고장인지, 누군가 꺼놓은 것인지.


일어나려고 했다.


소리가 들렸다.


낮고, 균일하고, 일정한 소리였다. 바람은 저렇지 않았다. 바람은 불다가 멈추고 다시 불었다. 이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멀리 있었는데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 엎드렸다. 빠르게. 배가 땅에 부딪혔다. 아팠다. 숨을 참았다. 풀 속에 얼굴을 묻었다. 흙 냄새가 났다. 차갑고 축축했다. 풀잎이 볼에 닿았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소리만 들렸다. 낮고 균일한 소리.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가까이 왔다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직선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로는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풀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닐 것이었다. 바람이었을 것이었다. 배 아래쪽이 뻐근하게 아팠다. 오래 엎드려서. 숨이 차서. 무거워서.


소리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멀어졌다. 멀어지고 있었다. 진짜 멀어지는 건지, 높아져서 안 들리는 건지 몰랐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소리가 멀어졌는지 가까워졌는지 판단하려고 했다. 판단할 수 없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컸다. 심장 소리 사이사이에 바람 소리가 끼어들었다. 풀이 흔들리는 소리. 어딘가에서 벌레 소리. 밤의 소리들이 섞여 있었다.


소리가 멀어졌다. 1분. 2분. 야안나는 기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봤다. 구름이 흘러가고 달이 조금 보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근데 무언가 있었다.


저 위에. 까맣고 길쭉한 것. 소리도 없이, 그냥 거기 있었다.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가 보이기 시작하면 계속 보이는 것이었다. 구름 사이에 있었다. 달빛에 윤곽이 드러났다.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있었다. 사라지기를 바랐다. 사라지지 않았다.


야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게 선택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몸이 굳어 있었다. 손이 풀을 움켜쥐었다. 물병이 옆구리에 차갑게 닿았다. 어머니 장갑 속에서 손이 미끄러웠다. 배 아래쪽이 뻐근했다. 오래 엎드려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날개가 길었다. 소리가 없었다. 바람도 아니고 새도 아닌 것이 움직이지 않는데 살아있는 것처럼 떠 있었다. 새라면 날갯짓을 했을 것이다. 바람이라면 흔들렸을 것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떠 있었다. 하늘에 고정된 것처럼. 구름은 움직이고 달은 움직이는데 이것만 가만히 있었다.


야안나는 그것을 봤다. 그것도 야안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없는 것이 보고 있었다. 어떻게 아는지 몰랐다. 그냥 알았다. 그것은 야안나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풀밭에 엎드려 있다는 것을,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숨을 참고 있다는 것을. 배가 불편하다는 것을. 허리가 아프다는 것을. 어쩌면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냥 거기 있었다. 조용하고 어둡고 높은 곳에. 하늘의 일부처럼 보였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였다. 까만 구멍.


바람이 불었다. 풀이 흔들렸다. 야안나의 머리카락이 풀과 함께 흔들렸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야안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100미터. 뛰면 된다. 뛰면 철조망에 닿는다. 철조망을 넘으면 완충지대고 완충지대를 지나면 그쪽이다. 그쪽에서도 드론이 뜬다. 그쪽에서 띄운 드론이다. 하지만 그쪽에는 사람들이 있다.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있기를 바랐다.


소리가 달라졌다. 아까보다 낮아졌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안나는 풀을 더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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