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화_오후의 햇살이 거실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D-4015

by 이아진 leeA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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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015.



여름방학이었고 오후의 햇살이 거실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햇살이 닿은 바닥은 따뜻했고, 닿지 않은 바닥은 시원했다. 카엘은 맨발이었다. 따뜻한 바닥과 시원한 바닥 사이를 발가락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소파에 올라갔다. 소파 쿠션이 햇빛에 데워져 있었다. 등이 따뜻했다.


카엘은 소파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로봇이 나오는 만화였다. 주인공이 거대한 로봇을 조종해서 적과 싸우는 이야기. 시리즈 열두 권 중 일곱 번째였다. 카엘은 어느 쪽이 이길지 알고 있었다. 주인공이 이긴다. 항상 그랬다. 여섯 권 동안 그랬다. 그래도 계속 봤다. 어떻게 이기는지가 재미있었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 흐르는 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 수세미가 접시를 문지르는 소리. 가끔 어머니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슨 노래인지는 몰랐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바람이 가끔 들어왔다. 커튼이 흔들렸다. 하얀 커튼이었다. 바람에 풀 냄새가 실려 왔다. 여름의 풀 냄새. 풀을 베고 남은 날카로운 냄새가 아니라, 자라고 있는 풀의 부드러운 냄새였다.


창밖에서 매미 소리가 들렸다. 매미 소리는 오후 내내 이어졌다. 아침에는 없다가 해가 높아지면 시작됐다. 카엘은 그 소리에 익숙했다. 여름방학에는 항상 그 소리가 있었다.


“카엘.”


“응.”


“밖에 나가서 놀지 그래.”


“여기가 좋아.”


어머니가 더 말하지 않았다. 설거지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카엘은 만화책을 한 장 넘겼다. 로봇이 미사일을 발사했다. 폭발이 커다란 글자와 함께 나왔다. 빨간색과 주황색. 글자가 화면 전체를 채웠다. 적 로봇이 쓰러졌다. 부서진 파편이 하늘로 날아갔다. 주인공 로봇이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석양이었다. 주인공이 멋있어 보였다. 카엘은 그 페이지를 한동안 봤다.



소파 한쪽 끝에 뜨개질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연두색 실이 바구니 밖으로 조금 흘러나와 있었다. 바늘이 꽂힌 채로 뭔가 절반쯤 만들어져 있었다. 작은 것이었다. 양말보다 작았다. 장갑보다도 작았다. 뭔지 몰랐다. 어머니 것이었다. 어머니가 요즘 저녁마다 뜨고 있었다. 카엘은 잠깐 봤다가 다시 만화책으로 눈을 돌렸다.


“저녁 뭐 먹고 싶어?”


어머니가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허리가 아픈 날에는 그런 목소리가 났다. 요즘 허리가 자주 아팠다. 오래 서 있으면 아프다고 했다. 설거지할 때도 서서 했다. 카엘은 어머니가 왜 허리가 아픈지 생각하지 않았다. 아픈 날도 있고 안 아픈 날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거나.”


“아무거나는 없어.”


“그럼 파스타.”


“어제도 파스타 먹었잖아.”


“그래도 파스타.”


어머니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서 웃는 소리가 거실까지 왔다.


“알았어.”



카엘은 만화책을 덮고 창밖을 봤다.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가 보였다.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그네를 타고 있었다. 그네가 올라갈 때 아이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내려올 때 웃음소리가 들렸다. 카엘은 그 아이들을 알고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한 명은 같은 반이었다. 이름이 기억났다.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가 좋았다. 소파가 따뜻하고 만화책이 있고 파스타가 나올 예정이었다. 만화책을 다시 펼쳤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더 강한 적이었다. 주인공 로봇이 위기에 빠졌다. 주인공이 조종석에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레버를 당겼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였다.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구두를 벗으면서 한쪽 발로 서 있었다. 일찍 퇴근한 것 같았다.


“일찍 오셨네요.”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 회의가 취소돼서.”


아버지가 거실로 들어왔다. 카엘을 봤다.


“공부는?”


“방학이잖아.”


“방학이라고 안 해?”


“내일 할 거야.”


아버지가 웃었다. 넥타이를 풀며 소파 팔걸이에 앉았다. 아버지한테서 밖 냄새가 났다. 햇빛과 땀과 약간의 커피 냄새가 섞인 냄새. 어른의 냄새였다.


앉으면서 옆에 있던 뜨개질 바구니를 무심코 밀었다. 바구니가 소파 쿠션 사이로 밀려났다. 연두색 실이 조금 더 풀렸다. 실이 소파 쿠션 위에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바늘에 꽂힌 작은 것이 바구니 밖으로 나왔다. 작은 옷 같았다. 아주 작은 옷. 아버지는 보지 않았다. 카엘도 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TV를 켰다. 뉴스가 나왔다.


화면에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긴 줄을 지어서. 배낭을 메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자막이 떴다. “난민 위기 심화.” 카엘은 보지 않았다. 만화책을 봤다. 만화책 속에서 로봇이 적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카엘.”


“응.”


“너 크면 뭐 하고 싶어?”


카엘은 생각했다. 크면. 크면이 언제인지 몰랐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어른?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넥타이를 매고 출근할 것이었다. 그건 아직 먼 일이었다.


“몰라.”


“아무것도 생각 안 해봤어?”


“응.”


아버지가 TV 볼륨을 낮췄다.


“선생님은? 되고 싶지 않아?”


“별로.”


“의사는?”


“주사 싫어.”


아버지가 웃었다. 카엘도 웃었다.


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하늘에서 찍은 화면이었다.


드론이 날고 있었다. 군용 드론이었다. 날개가 길고 몸체가 회색이었다. 자막이 떴다. “국경 감시 강화.”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화면 안에서 드론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땅이 보였다. 작게. 멀리서. 길이 보이고, 나무가 보이고, 작은 점 같은 것들이 보였다. 사람인지 나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높았다.


“저런 거 하고 싶어?” 아버지가 물었다.


“뭐.”


“드론. 조종하는 거.”


카엘이 화면을 봤다. 드론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드론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높아서. 너무 작아서. 드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고 있었다. 카엘은 그것이 신기했다. 아무도 모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 만화책 속 투명 로봇 같았다.


“모르겠어.”


“재밌을 것 같은데.”


“그래?”


“응. 게임 같잖아.”


카엘도 조금 웃었다. 게임. 만화책 속 주인공도 조종석에 앉아서 레버를 당겼다. 비슷한 것 같았다.



어머니가 불렀다.


“밥 먹자.”


식탁에 앉았다. 파스타가 나왔다. 토마토 소스. 접시에서 김이 올라왔다. 토마토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새콤한 냄새. 바질 잎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바질을 좋아했다. 카엘은 바질을 빼고 먹었다. 접시가 하얗고 소스가 빨갛고 면이 노랗다. 색이 예뻤다.


어머니가 자리에 앉을 때 천천히 앉았다. 한 손을 식탁 위에 짚고 몸을 내렸다. 무거운 것을 내려놓는 것 같았다. 카엘은 보지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셋이 먹었다.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 아버지가 파스타를 돌돌 말아서 먹었다. 어머니가 잘라서 먹었다. 카엘은 포크에 감아서 먹었다. 소스가 입 주변에 묻었다. 어머니가 냅킨을 건넸다. 창밖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놀이터에서. 해가 길어서 아직 밝았다. 여름이었다.


카엘은 파스타를 먹었다. 토마토 소스가 새콤하고 진했다. 면이 쫄깃했다. 소스가 면에 잘 묻어 있었다. 한 입 더 먹었다. 또 한 입 더 먹었다. 맛이 있었다. 그냥 맛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토마토가 맛있고, 면이 맛있고, 어머니가 만들어서 맛있었다. 여러 가지 맛이 섞여 있었다. 새콤한 맛, 짠맛, 고소한 맛. 전부 느껴졌다. 혀 위에서 맛이 퍼졌다.


아버지가 말했다.


“카엘이 드론 조종사 하고 싶대.”


“그래?” 어머니가 카엘을 봤다.


“응.”


그렇게 말한 적 없었다. 모르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부정하지 않았다. 파스타가 맛있었고, 아버지가 웃고 있었고, 어머니도 웃고 있었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좋은 것 같은데. 안전하잖아.”


어머니가 말했다. 파스타를 먹으면서. 한 손은 포크를 쥐고 있었고 다른 손은 식탁 아래에 있었다. 배 위에 있었을 것이었다. 카엘은 보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들 조종사 되는 거야.”


카엘은 파스타를 먹었다. 맛있었다.



저녁을 다 먹고 카엘은 자기 방으로 갔다.


방이 작았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책꽂이 하나. 책꽂이에 만화책이 줄지어 있었다. 책상 위에 여름방학 숙제장이 놓여 있었다. 내일 하기로 한 숙제. 내일이 되면 또 내일로 미룰 것이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는 할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천장에 야광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붙인 거였다. 아버지가 의자 위에 올라가고 카엘이 별을 건네줬다. 여기? 하고 아버지가 물으면 응, 거기, 하고 카엘이 대답했다. 여섯 개였다. 큰 별 세 개, 작은 별 세 개. 아직 거기 있었다. 한 개도 떨어지지 않았다.


창밖을 봤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남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구름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예쁜 하늘이었다. 카엘은 그런 것에 대해 예쁘다고 생각할 나이였다.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었다. 그네가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 아이들이 타고 있던 그네. 아이들이 가고 나서도 그네는 흔들렸다. 천천히, 작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봤다. 엄마였다. 자기 방에서 전화를 건 것이었다. 벽 하나 사이에서.


받았다.


“응!”


“방에 있어?”


“응.”


“오늘 파스타 맛있었어?”


“응. 맛있었어.”


“씻고 자.”


“응. 엄마도 잘 자!”


끊겼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천장을 다시 봤다. 별이 아직 빛나고 있었다.


벽 너머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냥 소리였다. 낮은 소리, 높은 소리가 번갈아 나왔다. 가끔 웃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좋았다. 카엘은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있는 소리여서 좋다는 것을 몰랐다. 나중에 그 소리가 없어지면 알게 될 것이었다.


만화책을 폈다. 로봇 이야기를 계속 읽었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주인공이 싸웠다. 이겼다. 다음 적이 나타났다. 싸웠다. 이겼다. 항상 이겼다. 만화 속에서는.


책을 덮었다.


불을 껐다.



벽 너머 대화 소리가 멈춰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잠자리에 든 것 같았다. 집 안이 조용했다. 냉장고 모터 소리만 부엌에서 들렸다.


눈을 감았다.


그때는 여름방학이었고, 파스타가 맛있었고, 야광별은 아직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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