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JIN Mar 20. 2023

모든 노동자들의 프로 의식
그리고 슈퍼노멀

한 끗의 차이

< pxhere.com >


나는 근 이십 년째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다. 이름만 대면 다들 알만한 대학병원인데 그 주기가 삼개 월일 때도 있고, 육개 월일 때도 있고, 일 년일 때도 있다. 예약 안내 문자가 오기 시작하는 일주일 전이면 잊고 있던 나의 스트레스도 시작이 된다. 사실, 가서 별로 하는 것은 없지만 병원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그 공간만으로도 그것이 나에게 주는 타격감은 엄청나다. 어떨 땐 첫 문자 이후 일주일 내내 골이 나 있는 정도이니.


잔뜩 찌푸린 얼굴과 굳은 표정으로 병원 입구를 들어서면 제일 처음 마주하게 되는 사람은 주차안내요원이다. 병원 내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자동차 말고도 차도로, 횡단보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들어오는 차 하나하나를 제어하고 통제하고 유도하신다. 대부분 무념하게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데 모난 마음이 동글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오늘 처음 마주한 그가 그 일을 즐기면서 하는 순간을 볼 때이다. 얼굴에는 표정이 살아있고 한겨울에도 몸짓이 유연하다. 앞 뒤 좌 우를 끊임없이 살피고 힘껏 유도봉을 흔들고, 멈춰 세웠다가 다시 진입을 안내하는 차량에는 가볍게 목례를 하신다. 어떨 때는 굳이 저러지 않아도 되는데 싶을 정도로 정중히 인사를 하신다. 한 때 백화점 입장 고객들에게 하는 90도 인사가 지나치다고 문제가 된 적이 있었고, 나 또한 무조건적인 인사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여기서는 그 의도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기에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매번 같은 분을 보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분을 만나게 되는 날에는, 나도 그냥 씨-익 웃게 된다. 그가 건넨 인사에 나 또한 목례로 답하며 병원이 주는 스트레스를 조금은 잊게 된다.


어느 날은 그랬다.

보통의 대학 병원이 그러하듯 한번 가면 머무는 시간이 길고 검사 때문에 공복을 유지할 때가 많은데, 긴 대기의 시간과 검사와 진료까지 모두 끝내고 나면 대부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녹초가 된다.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으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 가 차를 빼려는데 그만 동시에 나오려는 차들 때문에 순서가 꼬이고 말았다.


그때 보았다.

그의 드높은 전문가 정신을. 


나는 그가 춤을 주는 줄 알았다. 양다리를 쫙 벌리고 몸을 지탱하고 서서는 빨간색 유도봉을 정확한 순서와 방향으로 절도 있게 흔들었다. 유도봉을 든 손도, 안 든 손도, 90도로 180도로 들었다 놨고 앞으로 뒤로, 좌로 우로 쉼 없이 움직였다. 유니폼을 입은 몸통도 함께 돌아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몸을 지탱하던 다리는 이제 탭댄스라도 추는 듯 이리저리 필요에 따라 움직였다. 교과서에서 수신호를 배운다면 저런 게 아닐까? 그의 움직임은 아마 50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그는 신이 나 있었다. 또한 신이 나 있는 그는 정중했다. 그의 움직임은 모든 것이 일사불란했고 막혀있던 차들도 덩달아 일사불란해졌다.


나는 그만 울컥. 하고 말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식도 아래 어딘가에서 먹먹한 것이 올라왔다. 주책맞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 순간 알았다. 아... 내가 이십여 년을 다닌 이 병원에서, 몇 천명이 일하고 있는 이 어마어마한 곳에서, 그간 만났던 대단한 의사들과 수많은 간호사와 다양한 업무의 직원들 중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는 바로 저분이구나.



< 청소의 여신 >


나의 동네에 새로운 구립 도서관을 짓는다고 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도서관을 오픈한 지 한 달 남짓되었을 때 이 고약한 코로나가 터졌고 도서관은 그 길로 잠정 중단되었다.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몇 년의 시간 조절 끝에 다시 개관을 했지만 작년 여름 단 하루의 엄청난 비로 이 소중한 도서관은 그만 물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몇 달간의 공사와 정비를 끝내고 다시 전체 개관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나는 보게 되었다. 복도에서 잠시 쉬고 있던 깨끗한 밀대를. 그리고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화장실에서는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를 자주 만나게 되는데 늘 거울을 닦고 계신다. 이미 깨끗한데 계속 닦으신다. 세면대에 물기가 없는데 얼굴을 가까이에 대고 살피다 조금만 물기가 보이면 또 닦으신다. 화장실 휴지통에 휴지는 갈 때마다 비어져있다. 정수기는 누가 먹든 안 먹든 단정하다. 복도는 윤이 나고, 책들이 놓인 공간은 더 윤이 난다. 모든 창문을 주기적으로 열어 환기를 시키고 조금 후 조용히 다시 와 모든 창문을 닫으신다. 그녀의 걸레질이나 움직임은 언제나 소리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

이 청결하고 안락한 도서관은 바로 그분들의 노고로 빚어진 것이었다.





임상심리학자이자 버지니아 대학교 교수, 또 TED의 명강사인 '멕 제이'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탁월하라.
탁월함으로 고통에서 자유하라.



<출판사 서평> 


슈퍼노멀은 불가항력적인 역경과 실패를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저자인 멕 제이는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리켜 평범함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뜻의 '슈퍼노멀(supernormal)'로 지칭하면서 그들은 어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탁월함은 무엇으로 만들어질까. 탁월함은 사실 한 끗의 차이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병원 주차장에서 본 것은 아마도 놀라운 프로 의식(professionalism) 아니었을까? 과연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일까? 그분에게 춤추듯 수신호를 하면 월급을 더 주겠노라고 말했을까?

그건 아마 직업정신과는 다른 의미일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의 일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렇게 유쾌하게 탁월할 수 있을까.


도서관에서도 그러하다.

누구도 확인하지 않을 거울을 왜 그렇게 계속 닦으시는 걸까. 물기가 흥근한 세면대는 불편하고 불쾌하니 그 깨끗함을 유지하려 보이지 않아도 애쓰시는 걸 거다. 도서관 화장실은 변기 위에 앉아서 도시락을 까먹을 수 있을 만큼 청결하다. 이것이 프로 의식(professionalism)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 네이버 사전 >


병원에 동행했던 이가 말했다.



"와... 저분 봐. 대단하시다."


"요즘 회사에서는 본인 역할만 잘해도 다행이야.

자기 몫마저도 어떻게든 안 하려는 사람이 많아.

저런 분은 본인 역할 이상 하시는 분인 거고."


"저런 분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저러실 거 같아."



슈퍼노멀(supernormal)이란 이럴 때 쓰는 말 아닐까?

평균을 초월한, 평범함 속에 존재하는 비범한 아름다움.


그들의 탁월함은 프로 의식(professionalism)에서 시작되고

프로 의식(professionalism)슈퍼노멀(supernormal)로 나타나고

그 아름다움에 누군가의 하루는 감동이 되고

또 그 감동의 힘으로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돌아보면 내가 보지 못한 곳에 이미 그들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의 프로 의식(professionalism) 그리고 슈퍼노멀(supernormal)에 찬사를 보낸다.





이전 02화 TMI가 무섭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