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지금도, 살아가는 게 버거워지면 곧잘 떠올리곤 하는 풍경이 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그 끝에 맞붙어 반사되듯 펼쳐져 있던 반짝거리는 바다. 그 모습이 망막에 허상으로 맺혀오면, 신기루 같은 거란 걸 알면서도 손을 뻗어 보곤 한다. 그러면 이내 차가운 바닷바람이 살결을 스치는 기분이 들며 삶의 무게나 인생의 고통 같은 것들이 더 이상 버겁게 느껴지지 않게 된다.
그것은 고등학교 1학년, 세상에서 내 스스로가 가장 비참하던 시절에 떠났던 일탈과 같은 여행의 기억이다. 회백색으로 점철되어 있던 그 시절에 단 한줄기 무지개와 같은 추억.
새벽 다섯 시 반,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부스스한 아침이었다. 여전히 겨울의 손길이 남아 있어 동쪽 하늘가가 푸르스름하지만 은근슬쩍 발그레져서 곧 해가 떠오를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정신을 빼놓은 채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에 얼굴을 적셨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바로 오늘이다.
오늘로 정한 것에 별다른 뜻은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살면서 꼭 한 번씩은 들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그게 그냥 오늘인 것 뿐이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짐하듯이 떴다. 거울 속에는 결의에 찬 소녀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엄마가 챙겨준 아침밥을 먹고 교복을 갈아입은 후에 집을 나섰다. 현관문 앞는 누구보다 먼저 아침을 맞이한 신문을 평소의 습관처럼 챙겨 들고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중력이 사라지고 잠시 동안 내 몸은 하늘에 뜬 것 같다. 위가 뒤틀리듯 아파왔지만 오늘은 그것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오늘에야 비로소 답답한 일상을 탈출한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집 앞 버스정류장은 한산했다. 아직 출근 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고, 다른 학생들 등교 시간보다는 내가 조금 더 일찍 나온 탓도 있었다. 한산한 거리가 마음에 쏙 들었다. 금기를 깨는 건 누구도 모르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전율 넘치기도 했다.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이래저래 눈치를 보다가 또 기회를 놓치게 되기에 십상이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누군가 나오기 전에 버스가 먼저 도착한 덕분에 잔뜩 긴장했던 다리를 움직여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평소에 타던 학교 통학버스가 아닌, 학교 방향으로 향하는 시내버스에.
짤그랑거리는 동전의 쇳소리가 날카롭게 버스 안에 퍼지고, 그 메아리를 타고 버스 맨 뒷자리 창가에 가서 앉았다. 창밖으로 집이 멀어져갔다. 그리고 일상도 따라서 멀어져갔다.
버스에는 있는 사람은 겨우 대여섯 명 정도였다.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탄 나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이 버스가 향하는 곳에 내가 등교해야 할 학교가 있기 때문일까. 버스 안에서 고개를 숙인 채 모자란 잠을 억지로 욱여넣지 않아도 되는 것이 못내 좋았다. 옆자리에 영어단어를 외우느라 손바닥만 한 종잇조각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친구도 없었다. 누구도 애쓰지 않는 버스의 자유로운 공기가 시원했다.
시내버스는 굽이굽이 돌아 논을 가로질러 산을 넘고 시골길들을 지나갔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들을 내가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나? 분명 통학버스도 다니는 똑같은 길인데도, 바깥에 보이는 색채가 사뭇 달랐다. 연보랏빛 하늘이 점차 푸르러지는 것을 보며 내 마음의 어둠도 살며시 물러갔다.
일상이었다면 내가 하차해야 하는 곳에 다다른 것은 버스에 몸을 내맡긴 지 불과 40분 만이었다. 속이 뒤틀렸다. 이곳에서 내리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떨어지게 된다. 벨을 누를까, 말까, 눌러야 하는데, 오늘은 끝까지 가 보기로 했잖아, 아, 정말 어쩌지.
억지로 평온한 표정을 짓고 창밖을 계속 바라보았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가 내쉬었고, 다짐했던 것처럼 벨은 누르지 않았다. 버스는 일상의 내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다.
정류장을 노려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내 눈 속에 들어온 것은 차분한 숲길이었다. 초록 잎이 희끗거리는 초봄의 나뭇가지들이 신선하게 인사했다.
버스는 10여 분을 더 달려 종점에 멈추었다. 그곳에는 하늘과 같은 색의 바다가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모래사장 위로 뛰어들었다. 바다가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어 던지고 책가방마저 모래사장 위에 내팽개쳐 둔 채 무작정 바다 가까이 뛰어들었다. 파도가 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발을 담그고, 의외로 차갑지 않은 짠 물에 꺅 소리를 질렀다. 나도 반가워 바다야!
물론 그 이후 학교로 돌아간 나는 부모님을 소환해 오라며 길길이 날뛰던 선생님들도 상대해야 했고, 선생님들의 전화를 받아 걱정 반 분노 반으로 나를 맞이한 부모님과도 맞서야 했다. 그때야 눈물이 날 만큼 서럽고 무서웠었지만, 지금은 피식 웃음을 흘릴 수 있을 만큼의 추억은 지금의 나를 조금은 지탱해주고 있다.
지금은 그렇게 모든 것을 떨쳐 놓고 잠시라도 훌쩍 떠날 용기가 없어서, 그 날의 용기가 그립다. 그 날의 용기 덕분에, 그래도 내가 아직은 언제 어디로든 떠나고자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에 남겨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여행이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의 자유를 찾아 일상을 벗어 던지고 훌쩍 떠나는 것, 그것을 몸으로 느꼈던 그 날의 기억이 내 가슴 어딘가에 바다를 만들어 두었다. 내가 언제든 힘들면 떠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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