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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리미 Jun 30. 2023

“4주 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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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역 3번 출구로 나와 가래떡 구이, 양말, 스카프, 군밤 등을 판매하시는 가판대 사장님들을 오른쪽에 두고 쭉 걷는다. 파란색 병원 푯말이 시야에 들어오면 화살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 작은 언덕을 오른다. 유아차를 탄 아이들의 크고 작은 말소리가 들리는 어린이병원을 지나치자마자, 1시 방향에 위치한 외래동에 도달한다. 정신건강의학과는 외래동 지하 2층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병원 가는 길이 매우 단출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에 도착하기까지 굉장한 힘과 노력이 수반된다. 우선 병원에 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럽고, 나서는 발걸음이 썩 가볍지 않으며, 병원에 머무는 시간은 그다지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신나는 외래 방문 대축제’를 위해서는 당근이나 채찍이 분명 필요하다.


 당근과 채찍 중 내가 선택한 것은, 외래동 지하 1층에 위치한 주스 가게의 ‘ABC 주스’라는 당근이다. ABC 주스란 사과(Apple), 비트(Beet), 당근(Carrot, 당근에 당근이 들어간다!)을 갈아 만든, 신체의 해독 작용을 도와준다고 알려진 주스이다. 자의 반 타의 반 병원까지 꾸역꾸역 도착한 후 시원하고 달달한 주스를 꿀꺽꿀꺽 들이켜면, 켜켜이 쌓인 체증이 싹 내려가는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외래 진료 날은 ‘병원 가는 날’이 아닌, ‘ABC 주스 마시러 가는  날’로 명명하며 병원을 달콤하게 드나들고 있다.




 우선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에 도착하면 외래 진료 도착 확인 기계에서 분홍색 대기 번호표를 뽑는다. 나의 주치의 교수님 진료실 앞에서 일정 시간 대기한 후, 간호사 선생님이 내 이름을 호명하면 1차로 예진실을 경유해야 한다.

<예진실 선생님의 체크리스트>

1. 약을 빼먹지 않고 잘 챙겨 먹었는가

2. 약 복용 시 불편한 것은 없었는가

3. 잠은 몇 시에 들었으며, 몇 시에 깼는가

4.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는가

5. 지내면서 힘들었던 것은 없는가 등등


 이 밖에도 기타 특이사항 여부 등을 확인하고 나면 대기 의자에서 대기하며 잠깐 숨을 고른 후, 드디어 주치의 교수님 진료실에 입장할 수 있다.




 주치의 교수님과의 시간은, 까딱하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리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동안 지내면서 이건 교수님께 꼭 말씀드려야겠다, 혹은 궁금해서 여쭤봐야지 했던 것들을 다 털어내고 와야 하는 미션과 함께 교수님을 마주한다.

 가령,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까요?”라고 질문하면,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생각한다. 다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일 뿐, 그게 지속적이고 반복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라고 짚어 주시고,

 “문득 불안감이 밀물처럼 몰려올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라는 증상 호소에는, “불안은 이유 없이도 자주 나타날 수 있다. 본인은 지금 약으로 조절하는 중이다. 다른 곳으로 집중을 옮겨보는 전환 활동을 꼭 기억하자. 필요시 추가로 복용하는 항불안제를 활용하자.”라고 방법을 제시하며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신다.





 교수님의 궁금증과 나의 궁금증이 모두 해소되면, 이후 복용할 약 용량 처방과 다음 외래 방문 날짜를 정해주신다. 약 용량과 더불어 다음 외래 약속은, 소소하게나마 나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이를테면 저번 외래 진료 때에는 ‘3주 후’에 보자고 하셨는데 이번엔 ‘4주 후’에 보자고 하신다면, 1주일짜리 생명 연장 카드를 추가로 받는 기분이랄까? 외래 간의 간격이 줄어들면 아쉽고, 늘어나면 괜스레 뿌듯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료가 끝난 후 여러 색깔의 기분과 함께 연구 선생님과의 면담을 위해 연구실로 향한다. 이 면담이 끝나면, 병원에서의 기나긴 볼일이 마무리된다.




 “4주 후에 뵙겠습니다.”의 주인공 신구 선생님이 떠오른다. <사랑과 전쟁>에서는 항상 ‘4주 뒤’에 보자고 하였으나, 나의 주치의 교수님께서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n주 뒤’를 결정하신다. 저번 외래 진료 끝에는 6주 후에 보자고 하셨으니, 다음번에는 5주도 6주도 아닌 7주 그 이상을 처방받길 기대하며, 오늘 하루 일상을 잘 쌓아보려고 노력 한 줌 더하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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