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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라임 Nov 21. 2023

[일상에세이] "저는 다 좋아요"의 함정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써보려다 멍-해진 날

소소한 일상과 그림책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작가의 목소리로 나눕니다.

글 고픈날에는 브런치에서, 이야기가 필요한 날엔 팟캐스트에서 만나요

오디오 에세이 팟캐스트 링크 ▶http://www.podbbang.com/ch/1788857?e=24826426


 둥글 둥글, 튀지 않게, 배려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뭘까?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지만, 싫으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서구 사람들과는 달리 아직도 모두가 Yes 할때 No라고 말할 용기에 대해 논의할 만큼 한국에서 산다는 건 그만큼 단호히 나 자신을 내세우기 힘든 것 같다. 언어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맥락이 중요한 사회라고 한다. '좋아요', '싫어요' 처럼 똑 떨어지는 대답을 하기 보다는 분위기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대세를 따르고 동조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다들 잔뜩 레이더를 세우고 상황을 살피느라 바쁘다. 참으로 피곤할때가 많은 것도 다 그 탓이다. 


 그래서일까? 줏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인생을 좌우할 만한 특별한 무언가가 아닌 이상, 보통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다 좋아요.' 언제인가부터 점심 메뉴를 정할 때도, 어디서 만날지 의견을 묻는 단체창에서도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편해졌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말해보라고 해도 잘 모르겠다. 분명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으면서는 어제 뭘 했었는지 가물 가물 할 정도로 기억력이 감퇴하긴 했지만, 이건 기억력과는 별개의 문제인 듯 싶다. 그러니까 나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답하기가 어려워졌다. 오랜만에 찾은 노래방에서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도통기억이 나지 않아 허탈하고 헛헛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날, 종이를 펼쳐들고 손에 연필을 쥐고는 질문들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질문들을. 


 이를 테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음식은? 식당은? 음악은? 가수는? 장르는? 배우는?' 애꿏게 연필을 쥔 손가락에 힘을 줬다 뺐다하면서도 좀 처럼 답을 써내려가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 생각했다. 정답이 있는게 아닌데, 나에 대해 묻고 있는건데, 선뜻 답이 튀어나오지 않는걸까? 카리스마 있게 대중을 이끌며 엄청난 리더쉽을 발휘하는 리더는 아니었지만, 나 나름 줏대있게, 소신있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소 좁아진 세상에서 치열하기 살기보단 평온함을 쫓으면서 간절히 무언가를 쟁취해야만 하는 삶에서 멀어진 탓일까? "전 다 좋아요."라고 말하며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살아온 세월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이 내 속에 쌓이고 채워지면서 한때는 또릿 또릿 엣지 있게 반짝였던 내 뾰족함들이 점점 둥글, 넓적 흐리멍텅해지고 있는 것 같아 덜컥 겁이났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어느것 하나 특별히 좋아하는 것 없이 그저 밍숭맹숭한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마치 "전 다 좋아요!"를 외치다 그 함정에 빠져버린 것 처럼. 마치 '얼음 땡' 놀이를 하는 느낌이다. 누군가 다가와 "땡"을 해주기 전까지는 혼자서 달려나가기 힘든 곳에 덩그런히 내가 던져져 있는 것 같다. 어쩌다 나는 다른이가 먼저 나서주길 바라는 삶에 익숙해져 버린걸까? 갑자기 '나 잘 살고 있는건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머리가 쭈삣 선다. '이건 아니야!'



 불현듯 미디어의 황제라 불리는 '테드 터너'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무엇이든 해라! 이끌던지, 따르던지, 아니면 여기서 나가라"(Do something! Lead, Follow or Get out of Here)


 무엇이든 하라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어느 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가? 이끄는 사람이 되기에는 조금 부담스럽고, 그저 따르는기엔 좀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다고 방관자처럼 비켜설 생각은 없다. 돌이켜보니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는 적당히 다양한 친목 모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리더가 아닌 성실한 팔로우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 하는 것이 나를 만들어 간다고 하던데! 물론 나 스스로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은 주도적으로 운용해나가고 있었지만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관계지향적인 삶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살아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따라만 가는 인생을 상상해보니 좀 서글퍼졌다. 내일부터는 누군가가 던진 질문에 으레 선택지로 내밀었던 '전 다 좋아요'를 내려놓고 오랜만에 '의견'이라는 걸 내봐야지 다짐한다.


 그에 앞서 다시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심기일전해서 진지하게 써내려가 본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관심있는지에 대해서. 나에 대한 생각이 또렷해지면 그것이 튼튼한 통로가 되어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 가려져있던 세상에 대한 생각들도 형태를 만들어 내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나이 서른 아홉, 이제 한달 반 뒤면 진짜 마흔이 된다. 언제나 따르고픈 멘토들를 찾아 헤매였던 시간 벌써 40년이나 쌓였다. 여태 어른 아이인 나도 비키거나 따르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빛이 되고 힘이 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겠다. 그러려면 '전 다 좋아요.'의 함정에서 펄쩍 뛰어나와 내 손으로 직접 깃발을 들어야 하겠지? 누군가를 이끌 수 있는 배짱과 마음을 갖추고 가끔씩은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는 담대함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성실히 뭐라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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