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태에서 처음 나와하는 베냇짓 하나에, 손가락 움직임 하나에 모두들 감탄해 마지 않았던 어린 아이 시절. 그저 존재만으로도 경이로웠던 그때를 지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보여야 하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 같아요.
나 여기 잘 살고 있다고, 세상이 관심가질법한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작은 네모 상자 안에 찰나의 행복을 포장해 공유합니다. 분명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돋보이려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달려나가는 사람들 틈에 빨려들어가 다 같이 정신없이 뱅글 뱅글 돌고 있는 느낌이에요. 모두들 '날 좀 봐요'라고 목 놓아 소리치면서 여기저기 돌아보느라 분주해 보입니다. 이쪽, 저쪽을 살피며 스스로를 치장하는 동안 정작 우린 나 자신을 제대로 봐주고 있긴 한 걸까요?
가끔 내가 아주, 아주 작은 존재로 느껴질 때, 확성기에 대고 날 좀 보라고 외치는 세상에 지쳐갈 때, 세상과 누군가의 거대한 존재에 가려져 한없이 초라해보이는 내 모습이 서글퍼 질 때,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몸집을 부풀리다 지쳐 바람이 '슉'하고 빠지는 날이면 저는 이 책을 펼쳐듭니다.
작고 소중한 존재들이 건내는 세상과는 다른 시선의 이야기를 들으려고요. 그들은 말해요. 바깥 세상이 아니라 나와 스스로를 감싸고 있는 지금을 바라보라고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누리고 있는 삶의 끝도 없는 풍요와 가능성을 알아차려 보라고요.
오늘 소개 할 책은 명수정 작가의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입니다. 글로연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제목 Title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
저자 Author 명수정
출판사 Publisher 글로연
이 책의 첫 장에는 줄무늬 치마를 입은 단발머리의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등장합니다. 아이는 작지만 야무진 두손을 허리춤에 올리고선 눈을 동그랗게 뜬채 이렇게 물어요.
"이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
도대체 누구에게 묻고 있는 걸까요? 무릎위로 올라오는 짧은 주름 치마를 입고서는 치마가 끝까지 펼쳐지냐고 당돌하게 묻는 아이를 바라보다 책장을 넘깁니다. 아이의 질문에는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아닌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 대답을 해요. 아이처럼 자신들이 입고 있는 치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요.
첫 번째로 답을주는 이는 꿀벌입니다. 꿀벌에게 치마가 있냐고요? 그림책에는 노란 꽃 맨 위에 살포시 올라와 앉은 꿀벌이 등장해요. 그 아래로는 동그랗고 소담한 민들레 꽃이 보이고요. 꽃은 마치 벌꿀이 입고 있는 커다란 치마같습니다.
"꿀벌아 꿀벌아,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라고 아이가 물으면 꿀벌이 대답합니다.
"아니, 하지만 향기는 맑게 멀리 퍼질 거야." 라고요.
꿀벌의 치마인 작은 꽃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기에 대단하진 않아도 그 존체 자체로 의미가 있데요.
연잎 꼭대기에 뛰어올라 앉은 검정 개구리 밑으로 노랑, 연두, 초록의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을 품은 이파리가 촤르르 펼쳐져요. 개구리의 치마가 된 연잎은 비록 그 크기를 뽐낼만큼 거대하진 않지만 적어도 비가 오는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에게 쉼터가 되어줍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되었다고 말해요. 더할나위 없이 충분하다고요.
"꽃송이야 꽃송이야,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
단아하고 우아한 곡선이 아름다운 유려한 백자에는 볼록하고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가진 튤립 한 송이가 꽃혀있습니다. 붉고, 푸른 얇은 실선들로 섬세하게 그려넣은 동양의 아름다운 건물과 문양들이 백자에 새겨져있어요. 이 꽃병이 튤립이 피어날 세상이자, 그만의 치마인거죠.
"아니, 하지만 내가 활짝 피어나기엔 충분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더 몸집을 부풀리려 애쓰지 않아요. 내 옆의 자리한 다른 꽃은 품이 훨씬 넓은 꽃병을 차지했다고, 다른이의 존재가 얼마나 화려하고 탐스러운지 곁눈질하며 견주어보지 않아요. 그저 내가 꽃을 피울 수 있는 딱 그 만큼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더 많은 것을 원하며 살아가는지요? 이미 충분할 때도 말이에요.
이제 아이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동그랗고 탐스럽게 빛나고 있는 꽉찬 보름달을 바라봐요.
"달아 달아, 네 치마 세상 끝까지 펼쳐져?"
은은하게 뿜어내는 달빛은 그의 품만큼 세상을 비춰냅니다. 달 끝을 따라 사방으로 펼쳐지는 빛의 그림자는 그의 치마가돼요. 어두움이 밀려나 밝히 비추는 그의 치마엔 꼬불꼬불 오솔길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이 담겨있습니다. 한폭의 그림처럼요.
"아니, 하지만 꽤 기분 좋은 날이야."
고단한 하루의 끝에 혹은 어둠을 몰아내고 끝내 무언가를 이루고 난 후에, 꼭 반짝 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있어야하는건 아니래요. 그저 그 순간, 소박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주어진 순간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거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아이는 또 다른 작은 존재들을 만나 묻고 또 물어요. 동글 동글 소담히 열린 앵두를 치마 삼아 그 끝에 매달린 무당벌레에게, 물결치듯 아래로 초록잎들을 쏟아내고 있는 거대한 버드나무를 치마 삼은 검정새에게, 노을 속에서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그 위에 우두커니 서있는 부엉이에게, 그리고 또 다른 치마를 가진 이들에게요. 그들은 복닥복닥 시끄럽지않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차분히 대답을 해줍니다. 그들의 충만함에 대해서요.
그건 소녀에게 건내는 답이자 질문이기도 한것 같아요. 소녀 자신의 치마는 무엇인지, 너의 세상인 치마에서 오늘 무엇을 발견하고 느꼈는지에 대해서요. 너무 욕심내지 않아도 된다고, 남들처럼 내달리느라 무겁고 버거운 발걸을을 매번 재촉하진 않아도 된다고요. 그저 부드럽고 따뜻하게 너의 세상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 세상을 애정있게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충만함을 주는지 알려주는 것 같아요. 그 후에 네 옆의 사람들을 바라봐도 늦지 않는다고, 사실 그다지 신경쓸 필요없다고요.
따뜻한 답을 한가득 안고 돌아온 소녀는 자신의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자신의 치마가 가진 품안에 원하는 세상을 그려나가요. 얼굴에 미소를 가득 품고 자유롭게요.
세상에 내 존재를 각인시키고 애쓰는 대신 스스로의 의미와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 아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질문을 던져 준 이 책의 소녀와 답을 해준 작은 존재들을 통해 깨닫습니다. 당신의 치마는 무엇인가요? 마지막으로 그 자신을 찬찬히 살펴봐 준적은 언제였나요? 하루 중 일부를 쪼개어 잠시나마 나의 치마를 찾고 바라봐주는 시간을 갖습니다.
오늘 소개한 '세상 끝까지 펼쳐자는 치마'는 그림체와 색감 또한 너무 아름다운 책입니다. 2019년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과 함께 가장 명예로운 어린이 도서 상 중 하나인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 비엔날레' (BIB)에서 '황금사과상'을 받기도 했어요.
각각의 페이지에 나오는 치마에는 다양한 나라의 동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나와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한국의 바리공주, 중국의 뮬란, 스위스의 알프스 소녀, 캐나다의 빨간 머리 앤, 영국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캐릭터들은 물론, 다소 낯선 주인공들도 찾아볼 수 있어요. 동화 속 주인공과 그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꼭 찾아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곳곳에 작고 사랑스럽게 그려진 주인공들과 이야기를 찾아내는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가끔씩 내가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존재로 느껴지는 날. 거대한 세상의 그림자에 가려져 존재감없이 초라해진 느낌이 드는 날. 그런날 마음에 화사함과 따스함을 전해주는 책, 오늘은 명수정 작가님의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를 소개해드렸습니다. 그럼 다음주 금요일에 또 다른 그림책 에세이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