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진 작가
96년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청소년을 위한 문학이라는 강의를 들었어요.
그곳은 중서부라 찐 미국적인 미국이었고, 학교를 벗어나면 그리 외국인이 많지 않은 곳이었는데,
그 강의가 오후 늦게 개설되어 있어서인지, 현직 선생님들이 많이 듣고 있더라고요.
한 주에 책 한 권씩 읽고 와서, 그 책에 관한 평가와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탈선 청소년, 우정과 가족갈등, SF 등 다양한 주제로 책 추천리스트가 주어졌어요.
어느 날, 재미 일본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어 읽었는데,
한 소녀가 식민지 조선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전쟁이 나게 되었고,
할 수없이 소녀와 가족들은 재산들 두고 그 식민지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가서,
개고생을 한 경험을 녹여서 쓴 글이었어요.
예전의 풍요로웠던 조선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그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러 갔더니, 강의실에 가득 찬 수십 명의 대학원생들이,
전쟁의 참상이 너무 끔찍하다면서, 그런 역경을 이겨낸 작가 칭찬을 한참 하더니,
미국처럼 다문화 상황에서 이런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 문학은 훌륭하다고 찬사를 보내더군요.
듣다 듣다 괴로워서, 평소 과묵했던 아시아 여성의 탈을 벗고, 제가 손을 들었어요.
모처럼 든 내 손을 보고 교수가 나를 지목했는데,
제가 교수가 아닌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한마디 했어요.
내가 이 작가가 말한 식민지 조선 출신인데, 그때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풍요를 위해 디게 고생했다고 들었다.
이 소녀가 끊임없이 전쟁이 없었다면..이라고 책에서 말하는데, 그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이 조선만 침략했을까? 그들은 아시아를 다 건드렸다. 전쟁도 그들이 먼저 시작했고...
너희들 클래스에는 일본이 배경인 아이들과, 일본이 침략한 나라가 배경인 아이들이 같이 있다면,
너희는 이 텍스트를 어떻게 가르칠 거냐?
이런 고민이 처음인듯한 순수한 미국 선생님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교수가 나보고 아주 좋은 포인트라면서, 강의를 수습했는데요.
인상이 깊었는지, 그 강의 다음부터는 꼭 끝에 내 의견을 물어봐서 제가 아주 욕봤어요.ㅠㅠ
그리고는 시간이 흐르다 세월로 지났고,
그 사이사이로 기술도 진보하고 해서,
2022년, 이젠 애플티브이에서 파친코를 상연하는 걸 보니,
오호라 감회가 새롭네요.
파친코에 대한 감상이야, 뭐, 토지의 다른 버전 같고요.
일제 식민지 역사 자체가 원체 독한 맛이라, 슴슴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가 극적인 나라도, 농약보다 독한 거, 많이 마신 나라도..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소개가 덜 되어서 그렇지요.
그래서, 다시 주목하는 것은, 역사를 잘 다듬어 낸 작가의 저력,
그 작품을 영상화로 제대로 해낸 굵직한 애플티비 프로듀서들의 역량,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말빨이 들어가게 만든 K-컬처가 가진 힘입니다.
이민진 작가가 역사학이 전공이라는데, 역사를 위해서 글을 쓴 거 같은 느낌이 나고요.
그 시점을 역사가 소홀히 스쳐 지나가버린, 아주 평범한, 그러나, 그런 역사 앞에 강인했던 사람들에게 두고 있어 더욱 가치 있어요.
이민진 작가가 인터뷰나, 강의하는 모습과 내용을 보면 말이죠.
미국 사람들이 진심으로 엄청 좋아하는 게 느껴져요.
그들은 자기 나라에 이민 온 이민가정의 자녀들이 이민진 작가처럼 자라길 바라죠.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뿌리, 민족, 그리고, 그 배경에 대한 네래이티브를 잘 전달해내서,
이민국가인 미국을 풍요롭게 하고, 인종과 민족을 뛰어넘는 공감과 서로의 이해를 돕는 그런 역할을 해내는 것 말이죠.
또한, 이민진 작가의 태도를 보면, 미국 지식인들이 작가에게 원하는 걸, 정확하게 가지고 있어요.
개인이 가진 서사도 그렇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도 그렇고,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도 그렇고, 차분차분 설득하고,
끝까지 질문을 경청하고, 상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방식도 그렇고요.
2017년에 처음 출간된 파친코를 벌써 몇몇 고등학교에서 교과서로 일부 채택되고 있다는데,
미국애들이 배울 제대로 된 한국 역사와 재일교포의 삶에 제가 다 설렙니다.
파친코는 슴슴한 맛이라고 했는데,
음식 좀 먹어 본 사람은 압니다.
그 슴슴한 맛에 빠지면, 얼마나 무섭게 많이 먹게 되는지를요.
열은 이렇게 서서히 달궈가야, 오래가고,
어느 정도로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상관없는 사람들도 슬슬 걸려들고,
그렇게 걸려들어야, 단단히 붙들 수 있어요.
파친코도 파이팅이지만,
이민진 교수가 갈수록 미국 내에서 커다란 목소리를 가지게 되길..
응원합니다.
요새 한참 인기라는 그녀의 강의를 링크 겁니다.
학생들의 질문도 좋고, 이민진 작가에 대해서 많이 알아 가네요.
번역은 읎... 알아서, 우리 알아서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