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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5주년 기념일 단상, 산호와 버섯

결혼 35주년 기념 1박2일 여행 온 강원도 원주에서

by 꿀벌 김화숙

산호와 버섯

나희덕


산호와 버섯의 공통점을 아니?

포자로 번식한다는 거야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지.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뼈를 지닌 동시에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영혼을 지니고 있으니까.

깊은 바닷속을 상상하면서도

축축한 나무 그늘에 숨는 걸 좋아하니까.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

그 포자들이 자라는 시의 그늘에서 우리는 만났지.

그리고 서로의 영혼을 금세 알아보았지.


그녀는 나의 시에 자라는 버섯에 대해 묻고

나는 그녀의 시에 자라는 산호초에 대해 물었지.


세상 끝의 버섯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저편에 대해

숲에서 버섯을 캐고 있는 가난한 손들에 대해

값비싼 송이버섯을 따라 움직이는 자본의 흐름에 대해

하얗게 죽어가는 산호초의 안부에 대해

불이 나야 번식을 하는 유칼립투스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는 아주 멀리 가기도 했지.


나는 그 먼 바다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그녀는 이 땅의 흙냄새를 맡아본 적 없지만


그녀의 고향 토레스아일랜드,

섬집에 누워 그 푸른 하늘을 잠시 엿본 것 같네.

부족들의 다정한 얼굴에 둘러싸여

짧은 단잠을 자고 일어난 것 같기도 하네.

수영을 못하는 내가 그녀를 따라

바닷속 깊이 내려가 산호초를 본 것도 같네.


내일은 그녀와 헤어지는 날

나지막이 나는 말하려네야오*, 다음에 만나


* yawo: 토레스 아일랜드 원주민이 헤어질 때 인삿말로, '안녕'이라는 뜻


-나희덕의 시집『시와 물질』





1990년 9월 24일 내가 결혼한 그날로부터 정확히 35년이 차고 넘쳤다. 35주년 결혼 기념 여행으로 숙덕부부는 원주로 1박2일 여행 중이다. 1박하고 일어난 이 아침, 햇빛 부신 호텔방 창가에서 기록을 남기고 나가려 한다. 3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을 함께 하고 있는 두 사람.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함께 만들어갈 새 길을, 산호와 버섯으로 종횡무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결혼 35주년을 서양 풍속에서는 '산호혼'이라 한단다. 우리 풍습으론 뭐라 하나 찾아보았지만 딱히 쓸만한 게 없어서 산호혼으로 기념해 보기로 했다. 생각해 보자. 부부가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축하하는 결혼 기념일 문화가 우리 전통에 있던가?오랜 세월 회로한 부부에게 하는 결혼기념일 잔치는 있었다 하나 그건 부부가 주체가 된 이벤트라기 보단 유교적인 '효도 잔치'에 가까웠다. 부부유별 부자유친의 유교 문화에서 부부는 당최 평등한 파트너가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고백하자. 결혼도 모르겠는데 산호는 더 모른다. 저 멀리 어느 바다에 산다는데, 기후위기로 백화 현상으로 죽어간다는데, 산호로 35주년을 이야기한다는 게 뜬구름 잡는 소리겠다. 그만큼 결혼과 사랑이란 게 갈수록 낯선 거라고 둘러대 본다. 롤 모델 없는 새길이었다. 익숙한 것들을 다시 생각하고 질문하며, 여차하면 해체하고 재정립하며 스스로 만들어가는 새길이었다. 남의 부부 사정 내가 다 알 순 없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35주년이 산호혼이라는데 산호 보러 가는 여행은 못 가지만 보석 산호 선물하면 어떨까?"

안 해본 짓을 궁리하다 산호에 꽂혀 버렸다. 여행 온 원주 예술 중앙시장 구경하다 보석상이 보였다. 불쑥 들어가 산호를 보여달라 했더니 메아리만 돌아왔다.

"산호는 진열된 건 없고요. 따로 주문하시면 제작합니다."

"보여 드릴 샘플도 카탈로그도 없어요. 얼마나 크게 하느냐에 따라 값이 결정되고요. 찾는 사람이 없어요."


평생 실반지 하나씩 끼고 사는 중년이 보석을 알 리가. 모르니 이렇게 용감하게 덤비는 거다. 두 군데 보석상 봤으면 됐다. 결국 산호로 기념하는 산호혼은 포기하고, 대신 바닷 속 산호를 생각하며 산호를 적은 시로 대신했다. 그리고 원주 중앙시장표 조끼를 2개 사는 걸로 달랬다.


동화수목원 임도 걷다가 어른 주먹 보다 큰 낯선 버섯을 만난 건 유레카였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하얀 갓이 오돌도톨 야구공같이 둥글고 큰, 혼자 자라고 있는 버섯이었다. 우리의 산호혼 여행에서 만난 가장 특별한 이미지였다. 꿩 대신 닭, 결혼 35주년 기념일에 부쳐, 나희덕의 시 '산호와 버섯'이 내게 화두로 들어왔다. 나 대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써준 시인이 고맙다.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

그 포자들이 자라는 시의 그늘에서 우리는 만났지.

그리고 서로의 영혼을 금세 알아보았지.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 나는 '결혼'이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으로 읽어 보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도 좋겠다. 우리는 그 그늘에서 만났고 서로의 영혼을 지금까지 알아보고 있다고 읽었다. 산호와 버섯, 바다와 산, 긴 세월 함께한 우정, 정치와 경제까지 우리는 걸으며 아주 멀리까지 대화 속으로 여행을 했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뼈를 지닌 동시에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영혼을 지닌 우리. 깊은 바닷속을 상상하면서도 축축한 나무 그늘에 숨는 걸 좋아하는, 그게 우리의 사랑이고 우정이고 영혼의 함께함이었다.


우리는 산호혼이라는 35년 결혼기념일에 '구약'을 파기하고 평등부부로 다시 살기로 한 '신약'을 이야기했다. 새 결혼 10년, 아니 우리가 평등파트너로 다시 살아온 세월은 8년이라고 말이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영혼을 지니고, 깊은 바닷속을 상상하면서도 축축한 나무 그늘에 숨으며. 영혼의 포자들이 자라날 그늘이 되어 줄 사랑을 꿈꾸며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함께 손잡고 한걸을씩 앞으로 나갈 것이다.


서로의 영적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로.

나는 그 먼 바다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그녀는 이 땅의 흙냄새를 맡아본 적 없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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