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휴대폰을 개통하기로
아이 휴대폰을 개통하기로 결심했다. ‘과연 옳은 일일까’ 아내와 오랜 기간 고민했다.
지난주 금요일, 아이가 미술학원 선생님의 쪽지를 들고 왔다. 매년 12월, 서울에서 열리는 아트 페스티벌에 아이들과 함께 참가하는데, 올해는 우리 아이와 함께 구경을 가도 좋을지 허락을 구하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의 열정에 감사한 마음도 잠시, 아이가 선생님과 둘이서 다녀와도 되는지 걱정이 든다. 아이는 휴대폰이 없다.
작년까지 아이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스마트폰 필요 없어 ‘
아이가 홀로 다니는 생활권은 집에서 10분 거리 안에 있다. 혹시나 부모랑 떨어지면 주변 어른에게 특히, 유니폼을 입거나 아이와 함께 있는 어른에게 당돌하게 부탁한다. 마트에서 혼자 다니다가 부모랑 떨어지면 아이를 찾으러 오라고 안내방송이 나온 적도 수차례였다.
그런데, 올해는 다르다. 게임을 하는 친구가 많단다. 게임을 하지 않으면 어울리기도 어렵다. 심지어,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서로의 얼굴은커녕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만 바라볼 뿐, 뛰어놀지 않는다. 아이는 말했다. ”난 같이 공도 차고 뛰어놀고 싶은데, 애들이 게임만 해 “ 대꾸할 말이 없었다.
가상세계에서는 자신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고 열심히 한 만큼 보상도 받고 레벨도 오른다. 무엇보다 부모의 참견, ‘안돼’가 없다. 아이들의 미래를 그려보다가 문득, 개싸움 영상이 떠오른다. 대형견 두 마리가 펜스를 사이에 두고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고 짖는다. 펜스를 치워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멋쩍게 입맛을 다시며 눈을 피한다. 다시 펜스를 두자 날뛰며 짖기 시작한다. 펜스 두기. 스마트폰은 보이지 않는 시공간이자, 높고 두꺼운 펜스가 된다. 현실과 가상의 인격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게임 속에서는 이상적인 자아가 만들어지고 빨리 성장한다. 피곤하고 지루한 현실은 점점 멀어진다. 도파민 중독이다.
이젠, 어떻게 사용케 하느냐가 관건이다. 사용시간을 제한하기? 앱별 사용량 통제하기? 결국, ‘안돼’로 돌아가고 있다. 아내의 제안에 수긍한다.
‘암호는 설정하지 못하고, 요금은 만원만 내준다. 끝‘
따로 제한하지 않되, 만원이 넘어가는 요금은 스스로 내면 된단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동안 게임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주말에는 아빠와 정해진 시간 동안 게임을 한다. 아빠는 스마트폰으로, 아이는 아빠 패드로. 엄마는 이런 습관이 바람직하단다. 게임은 아빠 패드로만 해 오던 습관이 들었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는 좀처럼 게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의문은 들었지만 그럴듯했다. 아이가 큰 화면으로 게임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아이 휴대폰을 개통하기로 결심했다.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아이를 믿고 스스로 제어하도록 할 수밖에.
어느 날, 아이가 모자를 들고 왔다.
‘아빠, 이 모자 오래돼서 새로 사야 해’
난, 겉모양을 대충 훑어보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왜? 멀쩡해 보이는데. 그냥 더 쓰고 다녀’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모자를 두고 나갔다. 며칠 후, 모자를 쓰고 외출한 아이가 화장실에 가며 내게 모자를 맡긴다. 난 모자를 받아 들었다. 상표가 반쯤 떨어진 채였고, 뒤쪽에 달린 찍찍이는 해져서 부착되지 않았다. 모자 안쪽은 찢기고 올이 풀려있다.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난 모자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아이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모자 줘’
’ 아들, 미안해. 아빠가 참 못됐다. 그렇지?’
부끄러웠다.
내 시선이 아이의 과거에 머물러 있을 뿐, 아이는 어느덧 아빠를 이해해 줄 만큼 자란 것이 아닐까. 최소한의 안전과 최대한의 사랑으로 키우자고 다짐했던 십수 년 전 각오를 잊고 있었다.
아이 휴대폰을 개통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