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감정, 전체의 태도
타이 브레이크 : 게임 스코어가 5 대 5가 되면 게임 듀스가 되어 2게임의 차이가 날 때까지 계속해야 되지만, 시간을 절약하고 선수의 체력소모를 방지하기 위해 게임 스코어가 6 대 6이 되거나 8 대 8이 되었을 경우(대부분 6 대 6에서 적용)에 먼저 1게임을 이기면 승자가 되도록 하는 제도다.
타이브레이크는 내가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테니스 룰이다. 애초에 멘털이 약하고, 긴장을 많이 하는 타입인 나에게 7포인트 단판 승부는 거의 악몽과 같다. 하지만 아마추어 대회에서는 빠른 경기 진행을 위해 거의 모든 대회에서 5대 5 타이브레이크를 적용하니 악몽에서 깨어날 길이 없다. 깔끔하게 타이브레이크까지 가지 않고 이기지 않는 이상. 지고 있다가 따라잡아도 문제였고, 이기고 있다가 따라 잡히면 더 문제였다. 나는 끈질긴 수비를 바탕으로 상대 실수를 유발하며 동점을 만들기'까지'는 잘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타이브레이크에 들어서면 상대도 침착하게 안전한 샷을 치니 먼저 무너지는 쪽은 대부분 나였다. 반대로 이기고 있다가 따라 잡혀 쫓기는 입장에서 타이 브레이크에 들어가면 더욱더 초조해지고 다급해졌다. 분명 경기 초반에는 나의 기세였는데, 그걸 빼앗겼다는 생각에 더 무리를 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5세트까지 펼쳐지는 프로 무대와 달리 6게임 1세트에 승부가 나버리는 냉정한 아마추어 시합에서는 곱씹고, 수정하고, 다시 도전할 기회가 없었다. 타이브레이크의 패배는 곧 경기의 패배이자, 얼른 짐을 챙겨 집으로 가라는 신호였다.
대학 동기 A는 타이 브레이크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지켜본 경기에서는. 애초에 워낙 테니스를 잘 치기도 했지만, 4강전이나 결승전처럼 중요한 경기에 타이 브레이크로 접어들면 백전백승이었다. 예선도 아니고 준결승, 결승까지 올라왔으면 상대방 실력도 굉장히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고수들도 A와의 경기에서는 역전을 당하거나, 너무 쉽게 무너져버리곤 했다. A는 지켜보는 관객이 더 긴장할법한 순간에도 날카로운 코스의 서브 에이스를 내리꽂았다. 상대의 공이 조금이라도 짧다 싶으면 절묘한 네트 플레이로 상대방의 허를 찌르기도 했다. 특히 스코어가 벌어졌을 때도, 단숨에 분위기를 바꿔 연속으로 포인트를 따내며 동점, 나아가 역전까지 이뤄내는 게 주특기였다. 잘하다가도 타이 브레이크만 들어가면 겨우 다 풀린 몸이 다시 빠르게 굳어버리는 나는 친구의 승부사 기질이 무척 부러웠다. 교내 테니스 대회에서 어두컴컴한 밤까지 결승전을 치렀고 결국 동기는 우승을 차지한 날이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다 같이 치킨과 맥주를 실컷 먹고 마시며 뒤풀이를 하다가 하도 궁금해서 물어봤다. 타이 브레이크 필승의 비결이 있냐고. 있으면 새가슴인 나에게도 가르쳐달라고.
뭐 별 거 있나. 그냥 집중해서 하나하나 치는 거지.
동기 A는 특유의 익살스러운 말투로 비결을 말해줬다. 마치 전교 1등의 "국영수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처럼 너무나 당연하지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게 뭐냐며 나도 덩달아 실없이 웃고, 가득 찬 맥주잔을 부딪히며 기분 좋게 마셨다. "타이 브레이크는 무조건 첫 번째 포인트를 따아해.", "모든 서브를 세컨드 서브라 생각하고 안전하게 넣어라.", "상대가 지쳤으니깐 슬라이스로 계속 넘겨라." 인터넷 전문가들과 다르게 친구 녀석의 비결은 간단한 마음가짐이 전부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하나하나'란 단어가 깊은 울림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우승자 친구는 포인트가 결정될 때, 찰나의 감정을 길게 끌고 가지 않았다. 맥 빠지는 실수를 하더라도 1포인트, 화려한 위너를 성공시켜도 1포인트였다. 실수를 곱씹기보다는 자세를 고쳐 스윙을 한번 해보고 말았다. 강력한 스매시로 포인트를 따도 씩 웃고 곧장 리턴 준비를 하러 걸어갔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미래를 망치는 악순환과 거리가 먼 행동들이었다. 모두가 실수를 하고, 일부만 성공을 한다. 실수했을 때 낙담하지 않는 사람이, 성공했을 때 자만하지 않는 사람이 결국 이기게 되더라. 실력은 비슷하고, 기세가 대등하면 결국 멘털의 차이가 다른 결과를 빚어냈다.
테니스는 수많은 스포츠 중 가장 자주 판정이 내려지는 종목이다. 축구는 90분 동안 반칙이 하나도 나오지 않으면 그대로 흘러간다. 하지만 테니스의 모든 포인트는 철저히 독립적이다. 0(Love), 15(Fifteen), 30(Thirty), 40(Forty). 포인트가 모여 '게임'이 되고, 6게임이 모여 '세트'가 된다. 3세트를 먼저 이기면 '매치', 즉 승리한다. '인, 아웃' 콜은 경기 내내 이어지고, 포인트는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방금 보여준 최고, 혹은 최악의 포핸드는 바로 다음 포인트에서 반복할 수도, 고칠 수도 있다. 타이브레이크에 강한 사람은 결국 순간의 감정을 게임 전체의 태도로 이어가지 않는 사람이더라. 나는 실수를 훌훌 털기보다는 왜 그랬을까 자책하곤 했다. 운 좋게 좋은 샷을 성공하면 마치 다 이긴 것처럼 설레발을 떨었다. 마음속 감정이 나를 휘두르며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태도로 번졌고, 그 결과는 항상 아쉬웠다. 감정의 동요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감정에 끌려다니며 서로 상관없는 일까지 그르치는 건 후회만 남는다. 이걸 깨달은 지금은 타이브레이크가 재밌.... 아니, 조금은 덜 두렵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다음 포인트를 생각해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면 또 어떤가, 결국 새로운 게임은 다시 0-0에서 시작이다.
때때로 우리는 실수를 한다.
이때 이런 위기의 순간을 얼마나 빠르게 극복해 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 노박 조코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