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치 포인트 : 승패를 결정짓는 최후의 1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챔피언십 결승전에서는 매치포인트와 같은 의미로 '챔피언십 포인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나에게 '테니스'가 희망의 증거라면, 희망의 원천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이었다. 그깟 공놀이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무척 소중하고, 그들과 함께한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다. 파고다 어학원에서 시험 준비를 해도 모자랄 시간에 파고다 마크가 새겨진 기념티를 입고 강원도에서 구릿빛 피부를 얻었다. 꽁꽁 언 테니스 코트에 소금을 뿌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차분하면서 대담하게 라인을 그었다. 말랑말랑한 테니스공 하나와 코트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낮으로 웃었다. 낯가리는 성격의 나도 최고의 선수는 나달이냐, 페더러냐를 주제로 밤새 떠들 수 있었다. 예상보다 즐거운 순간이 많았고, 기대보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청춘, 그 중심에 있는 동안 테니스를 매개로 마냥 즐겁게 뛰어놀 수 있었다. 모든 경험과 선택의 이유가 오직 '스펙'이 되어버린 슬픈 현실에 테니스는 내게 애써 잊고 지낸 '낭만'을 일깨워준 스포츠였다. 내가 테니스에 푹 빠진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재밌으니깐. 가장 단순하면서도 단순한 동기에 푹 빠져, 학점'때문에', 취업을 '위해서' 같은 부가적인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끌림과 즐거움만 쫓다 보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서 현재의 확실한 행복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어느덧 배가 나오고, 만성 '월요병', '일하기싫어증'에 걸려있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게다가 요즘은 '넵병'도 새롭게 앓고 있다. ('네'는 너무 건조하고, '넹'은 너무 가볍고, '넷'은 군대 같고. 그래서 적당히 깔끔하고 가볍지도 않으며 뭔가 확실한 인상을 주는 것 같은 '넵'으로 답변을 한다.) 그래도 테니스로 차곡차곡 쌓아둔 '추억'의 존재 이유를 깨닫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지만, 그건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떠나보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새로운 만남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이별하고, 성장하고, 어른이 된다. 예전만큼 자주 공을 못 친다고, 옛날처럼 몸이 따르지 않는다고 후회하고 불평하고, 자괴감을 느끼기보다는 순간순간의 공 하나에 흐뭇하게 웃음 지으며 운동을 즐긴다.
한때 무모하게도 테니스로 이루고 싶은 게 참 많았다. 모든 경기에서 꼭 이기고 싶었고, 기회가 되면 동네 대회를 넘어 전국대회에서도 입상하고 싶었다. 아슬아슬한 단판 승부를 짜릿하게 이기고, 트로피도 들어 올리는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게임, 평범하고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과정 그 자체였고, 모험이었다. 나의 테니스 인생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을 향해 함께 하는 과정이 소중하다. 그리고 행복은 멀리 있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랑하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가치였다. 기분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겁게 테니스를 치는 소소한 일상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코로나 19로 코트가 귀해진 요즘 더욱더 와 닿는다.)
언제나 매치포인트를 외치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이제 승자인지, 패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전히 더블 폴트 투성이에, 위너보다 실수가 훨씬 많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언젠가 터질 시원한 서브 에이스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묵묵히 라켓을 휘두를 뿐이다. 네트에 맞고 운 좋게 넘어가면 제일 좋고, 아니면 말고.
혹시나 유리해도(어드밴티지, Advantage) 누구나 실수하고(폴트, Fault).
행여나 실수해도 쉬어가는 걸(브레이크, Break) 허락하고(레트, Let).
어쨌든 결국은 사랑하고(Love).
인생의 언어를 사용하는 테니스든, 테니스로 추억으로 채워가는 인생이든.
뭐라도 되겠지. 그러니 걱정 말고 다시 플레이!
테니스는 인생의 언어를 사용한다.
어드밴티지, 서비스, 폴트, 브레이크, 러브...
그래서 테니스 경기는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안드레 애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