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지B - 1

by 송혜미

라지B가 지미와 체결한 계약엔 12년 후 어느 날 지미의 뒷덜미에 자체 증폭기 개조에 필요한 접촉 단자를 삽입하기로 되어있었다.


12년이 흘렀고 그날엔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지미는 계약을 이행했다.


지미는 자기자신이 앰프가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채 개조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멋을 내기 위해 귀에 피어싱 하나 박는 것즈음으로 생각했을까?


하지만 사실 지미는 그게 뭔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대기를 하던 지미의 머릿속에 아주 작은 아이였던 그날이 살포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미는 떠오른 기억의 실오라기 하나를 잡고 계속 끄집어냈다.


물의 냄새, 작은 알갱이의 감촉, 벌레의 발자국. 간질거리는 기억이 자욱했다. 지미는 잘고 잘은 기억 조각을 꺼내어 선명하게 밝히고 싶었다.


마침내 지미는 입을 열고 말했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고.

죽은 나무 밑에 앉아 손바닥에 떨어지는 통통한 빗방울을 핥아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건 통통한 빗방울이지 그것이 손바닥을 때리는 감촉이나 혀 끝이 손에 닿는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지미의 손바닥엔 표피 한 조각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런 걸 기억하는 게 가당키나 할까?


기억하지만 느낄 수는 없는 사실의 조각들로 까마득한 시절을 밝히긴 어려웠다. 지미는 자욱하기만한 과거의 어둠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결국 개조실로 입장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후 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의사와 지미 간의 계약에 따라 개조에는 4분 33초가 걸렸다.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고, 지미는 스무 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나이는 동일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의 기억은 대체로 맞을 것이다. 지미는 똑똑하고, 더 확실한 건 라지B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으니까.


라지B가 지미를 발견했던 날엔 굵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언제나처럼 도시 너머엔 기업들이 기술 전쟁에 여념이 없었고, 하늘에서 내리는 미지근한 물방울은 방사능 먼지를 슬프게 껴안고 있었다.


순수 인간이었던 일곱 살 지미의 표피는 방사능 피폭에 취약했을 것이다. 라지B는 지미를 발견하자마자 와락 품에 숨겨 있는 힘껏 집으로 달렸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지미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일로 가득했다.


라지B는 죽어가는 숲에서 지미를 발견했다고 한다. 순수 인간을 사냥하던 중이었다.


지난 수 십년 동안 순수 인간이 발견되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 하지만 라지B는 순수 인간의 존재를 믿었다. 카본 소재의 어깨만큼 굳건하고 단단히.


그의 보잘것없는 인생에 유일한 희망은 예술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었고, 순수 인간의 것이었으며, 세상에 남아있지 않은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라지B는 세상에 남아있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표현은 곧 돈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람들은 드문 것에 지갑을 열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그는 절박하게 순수 인간의 존재를 맹신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라지B가 순수 인간을 사냥다니는 동안, 사람들은 순수 인간에 대해 괴담처럼 떠들고 철학처럼 탐구하고 수학처럼 증명하려 했다. 순수 인간은 그 자체로 시끄러운 광장이었다. 사람들은 생생하게 말했다.


순수 인간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순수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그들은 잔존하는가?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증명할 길이 없었으므로 최신 인공지능을 탑재하고, 더불어 성대를 확성기처럼 개조해서 목청을 높이는 사기꾼이 이목을 얻기 마련이었다. 물론 청력을 개조하지 않아서 남의 말을 듣지 않기로 선택한 이들은 예외였으나.


사람들은 그들이 소멸했다고 말했다.


한때 지하 마을을 건설해 무기를 개발하고 전쟁을 준비하다가 토양에 스민 방사능 먼지에 피폭되어 멸종했다는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것이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순수 인간에 대항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순수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무의식 저편으로 감추고, 우리 – 신인류 - 의 우월감을 암시하고 그들을 멸시하듯 행동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필연적으로 열등했다. 순수 인간은 유전자 필터를 거치지 않은 채 아이를 잉태했다고 한다. 직접 교배를 통해 유전자 기록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의 몸에 장착된 순수 자궁에 아이를 품었다고 전해진다.


전설일까, 사실일까? 지미도 모체의 자궁에 안겨 있었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설은 그들의 이마엔 식별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생.


그들은 태아 상태에 성장 촉진제를 주입하지 않고 – 이 부분에 대해 지미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 소속 기업, 계약 번호, ID 등을 이마에 새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 이건 사실이라고 했다. - 식별자가 없으면 자신과 상대를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Agency O, 80943212, 개조율 55%, ID: B - XY - 2330’ 몇 가지에 불과한 정보도 나열하지 않고 어떻게 나를 설명하고 상대를 식별 한단 말인가?


게을러서 일까, 무심해서 일까.

그들은 자신을 설명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걸까.


하지만 나는 깨끗하고 하얀 이마를 상상하면 알고 있던 상식 사이로 저릿함이 샘솟았다. 그리움을 닮아 있는 감정. 그것이 순수 인간을 두렵게 하는 원인일까?

깨끗하고 하얀 이마가?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그리워해본 적이 있던가. 그리워할 것이 있던가. 질투? 부러움? 슬픔? 감정의 출처를 알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다 이를 잠재우는 새로운 감정이 나를 막아 세웠다.


구태여 나의 존재를 이해하고 싶지 않은 무력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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