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이거나달 Oct 20. 2021

정상인 산악회

 운동이라면 질색하던 아내가 갑자기 산에 빠졌다. 

처음엔 집 근처 북한산 둘레길을 가끔 걷더니, 북한산 봉우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저러다 그만두겠지’ 싶었는데 안 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일상이 됐다. 

가끔 혼자 가는 게 못마땅해서 잔소리도 해봤지만, 10년간 듣지 않던 내 말을 이번에 들을 거라곤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 새로 나왔다는 기능성 등산화에 적당히 세련된 등산복을 사고, 등산 전용 앱도 내려받아 북한산 정복에 나섰다.  마침 유행했던 아프리카 돼지 열병처럼, ‘산 사랑’은 동네에 빠르게 퍼졌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와이프는 정기 모임을 만드셨다.

발기인 성격의 처음 회원은 3명, 한 분은 원래 가끔 산에 오르는 분이었고, 또 한 분인 옆집 형수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최근 건강검진에서 특정 수치가 조금 좋지 않았던 걸 등산을 갈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근거로 찾아내 좋아했다. 전염도 빨랐다. 1~2주 만에 7명이 모였다. 산에 오르는 이유도 제각각, 이분들은 ‘독수리 7 자매’라도 된 것처럼 열광했다. 모임의 이름은 ‘정상인 산악회’.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뜨거운 열망을 나타낼 줄 알았는데, 그 의미보다는 자신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인들이라고 뜨겁게 믿고 싶어 만든 이름이란다. 그래서 이 독수리 7 자매는 매주 한 번 이상 모여 산에 오르고 있다.

      

 대강 전해 들은 일정은 이렇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 어린이집에 보내고 10시쯤 모여 산에 오른다. 12시나 1시쯤 내려와 점심을 먹고 해산한다. 가끔은 먹거리 한두 잔을 걸치는 것 같다. 요즘은 기온이 가끔 영하로 떨어지는데 이 ‘정상인’들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소한 모임에 만족감이 꽤 큰 것 같다. 일단 회장님이신 우리 와이프만 봐도, 내가 집안일을 아주 잘했을 때 수준으로 짜증이 줄었고 표정이 밝아졌다. 살도 조금 빠진 것 같고, 팔다리에 근육도 붙었다고 살짝 자랑을 했다. 옆집 형수의 그 건강 수치도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승무원 출신의 멤버 한 분은 2만 원짜리 등산 모자를 혼자 주문하고 오랜만에 설렜다고 한다. 나이가 비슷하고 결혼한 해도 같은 두 멤버는 40여 년 동안 모르다가 산에 같이 몇 번 올랐을 뿐인데, 마음을 털어놓고 고민을 공유하는 ‘솔메이트’가 됐다고 한다.      


 아마도 육아와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무한 반복의 일상이지만, 등산은 일단 산에 올랐다는 성취감이 그녀들에게 힐링이 되어 주는 모양이다. 이쯤에서 '왜 우리 남편들은 그녀들에게 북한산이 되어 주지 못했나?' 반성한다. 비봉, 향로봉, 사모바위,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응봉 등 정상인 산악회가 북한산 22개 봉우리를 모두 오르고 난 다음엔 나도, 우리 남편들도 그녀들의 23번째 봉우리쯤은 되어 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정상인’인 것 같다.      



이전 13화 동백꽃 피는 북한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