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기준
베트남 여행 필수 코스 중 하나는 짝퉁 시장이다. 호치민의 사이공스퀘어, 다낭의 한시장, 나트랑의 담시장, 베트남 여행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들어봤을 것 같은 짝퉁 쇼핑의 메카들. 베트남 여행 카페에서는 진품과 비슷하면서도 저렴한 가게와 적당한 시세가 활발하게 공유되고, ‘베트남에서 산 짝퉁, 한국 들고 올 수 있나요?’ 같은 질문에 ‘한 번도 문제 된 적 없었어요’ 같은 답이 달린다. 조금씩 저작권 의식이 강화되고 있는 것과 별개로 베트남 짝퉁 쇼핑이 너무 흔한 일이 되어, 이를 새삼스럽게 비판하는 것은 여행 분위기를 깨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던 과거의 나는 제법 짝퉁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모조품을 사지 않는 것은 물론 짝퉁을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사람들에 대해 종종 열을 올리고는 했다. 그런 마음으로 베트남에 도착했다. 어느 날 시내를 돌아다니며 가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크록스 매장이 망해 문을 닫은 것을 보았다. 길거리에서는 크록스라고 적힌 신발을 신은 사람이 넘쳐 나는데, 크록스 매장은 폐업 상태였다. 아무도 크록스를 정식 매장에서 사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브랜드 옷을 입고, 명품 가방을 든 사람들은 정말 쉽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짝퉁을 소비한 것으로 보였다.
소수의 베트남 사람들은 진품과 비슷한 레플리카를 찾아 나서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품과 비슷하려는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은 짝퉁을 버젓이 입고 다닌다. 아마도 해당 브랜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옷을 사 입었는데 짝퉁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반세오를 파는 아주머니는 구찌 로고가 가득한 잠옷을 입었고, 오토바이를 타는 청년들은 발렌시아가 로고가 비스듬히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다. 누가 봐도 퀄리티 면에서나 디자인 면에서나 진품과 한참 거리가 멀다. 급기야 콜라보 제품도 아닌데, 로고가 뒤섞인 옷과 디올 스티커가 붙은 차까지 발견할 수 있다.
짝퉁 제품은 짝퉁 시장 외에도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베트남의 쿠팡, 쇼피에서 브랜드 옷을 검색하면 거의 99% 짝퉁이다. 진품이라든가 모조품이라는 말도 없다. 하지만 로고와 상세 페이지는 공식 홈페이지 그대로 사용한다. 별점 5점에 만족스러운 후기가 달렸지만, 진품이 맞냐는 질문은 없다. 정품과 모조품을 따지려는 시도조차 없고, 해당 제품은 모조품이라는 단단한 전제가 판매자와 소비자에게 모두 깔려 있는 기이한 풍경이다. 급기야 이곳에서는 정품을 사기 위해서는 발품을 팔아야 한다. 정품에 맞는 돈을 주면 되냐고 하지만, 제값을 주더라도 짝퉁을 의심하게 되는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베트남 소득 수준을 생각하면, 일반적인 베트남 사람은 글로벌 브랜드의 소비자가를 감당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1000원대의 시급으로 마음 편히 커피 한 잔도 사 먹기 어려운 사람이 당연히 진품을 구매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난 사람들이 짝퉁을 사는 이유가 절대다수가 짝퉁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짝퉁을 소비하는 세상에서는 짝퉁 생산과 판매, 소비에 대한 문제의식과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나아가 오히려 진품을 사는 사람들이 ‘호갱’이 된다. 단순히 싸게 살 수 있는 제품을 비싸게 사는 데서 오는 억울함의 수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소한 감정이 올라온다.
베트남인이 짝퉁을 많이 입는다, 여기까지의 생각이었으면 시간 내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짝퉁에 열을 올렸던 나는 더 이상 모조품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입고 있는 나이키 티셔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이키는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짝퉁이 흔한 브랜드다. 내가 만난 베트남 사람은 모두 짝퉁 나이키 옷을 입고 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진품이라고 생각할까?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외모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짝퉁 나이키에 익숙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내가 제값을 주고 산 나이키 티셔츠의 가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원칙적으로 생각하면, 진품을 산 사람과 모조품을 산 사람은 같은 물건을 다른 가격으로 구매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품질을 비롯해 사용자 경험, 사후 관리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물건을 구매할 때는 눈에 보이는 물건뿐만 아니라 그 물건이 지닌 가치를 함께 사는 것이다. 명품이라는 시스템은 결국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가 해당 물건에 대한 가치에 관한 동일한 믿음이 있어야 유지된다. 저 물건이 모조품일까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순간, 해당 물건의 가치는 진품 여하에 관계없이 급격하게 하락한다. 대규모 짝퉁이 풀린 명품 가방의 특정 라인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여전히 나에게 유효한 가치를 지니는가?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면, 부끄러워진다. 미니멀리스트로서 최소한의 옷과 물건을 사는 그 과정에서도 브랜드 가치를 따지던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서다.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라며, 수많은 옵션 중에 나의 필요에 의해서 신중히 품질을 따져 골랐던 많은 물건들의 의미가 흐려진다. 물론 나는 수많은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다. 브랜드 물건이 오히려 제 값을 한다, 브랜드 상품이 보통 품질이 좋기 때문에 양품을 고르는 시간을 단축해 준다, 브랜드 가치가 있는 물건이 중고로 되팔 때 가격 방어가 잘 된다, 같은 현실적 이유들. 다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단 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반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여전히 가치를 갖는 물건은 무엇인가? 물건의 쓰임을 생각했을 때, 나에게 소중한 물건들은 정말 손에 꼽는다. 적절하게 신체를 보호하면서도 내 몸에 잘 맞는 옷들,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전자 기기, 오래도록 편하게 걸을 수 있게 해주는 가벼운 가방과 신발, 삶의 질을 높여주는 최소한의 가구들, 매일 사용해 애착이 가는 텀블러나 그릇 같은 것들. 물론 이 역시도 수많은 대량 생산 제품 중 한 가지지만, 적어도 내가 쓰는 그 제품만큼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외에 소유한 대부분의 물건들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으며, 그 가치가 가변적이다.
사람들의 인식과 같은 외부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게 브랜드의 가치라면, 그것은 본질보다는 허상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매년 등장하는 생소한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브랜드 가치를 세밀하게 평가하고, 모두가 본인만의 고유한 취향을 가지고 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취향과 평가에는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이 이 브랜드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물음이 전제되어 있다. 디자인 감도니 엄격한 품질이니 따져도 결국 사람들이 이 브랜드를 힙하고 쿨하게 생각하냐, 나아가 일종의 명품으로 취급하냐로 귀결된다.
이제는 어설프게 브랜드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모든 사람이 짝퉁을 소비하는 세상이라면, 이 옷이나 물건을 살 가치가 있냐고 물어야겠다. 모두가 당연스럽게 모조품을 구매해 그 누구도 나의 것이 제값을 준 상품인 것을 알지 못해도, 그러니까 아무도 이 브랜드 가치를 알아주지 않거나 심지어 브랜드에 대해 한참 오해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꿋꿋하게 본질적인 가치를 캐내어 이것을 살 것이냐. 그 정도의 물음이라면 나의 헛된 욕망과 참된 필요를 명징하게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바람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