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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Aug 10. 2024

불쌍한 이들의 생이 여기 이곳에 묻히다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



불쌍히 여기는 마음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를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또한,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를 나와 동일 선상에 놓고, 그 사람의 마음을 오롯이 받아들임으로써 그가 겪고 있는 아픔을 마치 내 것처럼 느낀 나머지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와 버린 한숨 같은 것일 수 있다. 그 사람의 아픔이 남 일 같지 않아서, 그 사람이 드러낸 아픔의 표현 하나하나가 너무나 또렷이 보여서 그의 아픔에 사로잡혀 버리고만 자의 입에서 어쩔 수 없이 뿜어져 나온 외마디 비명일 수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불쌍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 사람의 힘듦이 생생하게 느껴지기에, 그 힘듦이 자아내는 절절한 아픔을 나 또한 느낄 수 있기에 나도 모르게 그의 아픔 앞에 무너지듯 "불쌍한 사람!"하고 외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은 특별하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에게서 외따로 떨어져 나와 외로움을 향해 곧장 질주하곤 한다. 보통의 사람들로부터 내쳐진 이 특별한 이들은 운이 좋으면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받는다. 보통의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누리며,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대부분은 보통의 사람들 속에서 소수자로 무시당하거나, 불편한 사람으로 외면받는다. 존재만으로도 꺼려지는 사람이 된 이 특별한 이들은 자신의 특별함을 누리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채 외롭게 시들어간다. 외부에서 쳐들어온 무시와 배척은 이들 내면을 갉아먹는다. 자기를 존중할 힘이 서서히 꺼져 간다. 결국 밖에서뿐만 아니라 안으로도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특별하지만 불쌍해진 사람, 이 외로움에 시들어버린 사람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자신의 남다름을 긍정의 눈으로 새로이 발굴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특별하여 내쳐진 신세로 인해 겪게 되는 이 모든 어려움과 그 앞에 드러내 버린 외로움, 슬픔의 표현을 감지하고 위로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무시당하고 외면받는 이 특별한 이들의 모든 것, 이들의 특별한 부분도, 그로 인해 아파져 버린 이들의 마음도, 작은 요소 하나하나까지 모두 관찰하고 세상에 드러내 줄 용감한 사람이 필요하다. 이 모든 관찰 끝에 이들에게 공감하고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그런 따스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필요하다. 존중의 태도로, 관심의 마음으로, 사랑으로 이들의 내면을 다시금 채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스운 감정도 아니고 비아냥대는 감정도 아니고 업신여기는 감정도 아니다. 무조건 안 좋은 감정으로 매도할 만큼 나쁜 것만 담긴 감정이 아니다. 너무나 아낀 나머지, 너무나 동화되어 버린 나머지 그 사람을 보면 저릿하게 애잔해지고 마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결국 함께 애잔해짐으로 귀결되어 버리는 그런 절절하고 따뜻한 감정이다. 원치 않게 외로워진 이들을 달래줄 수 있는, 다시 채워줄 수 있는 온기가 가득 담긴 마음이다.



자연의 법칙


자연은 가끔 인간에게 가혹하다. 노인, 시간의 손을 잡고 늙음으로 나아가는, 아픔을 켜켜이 쌓아 나가는 자. 죽음,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썩어 문드러져 이생의 모든 것과 작별한 채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자기 앞에 놓인 생,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제시받지 못한 채 그저 태어나져 버린 자의 앞에 갑자기 뚝 하고 떨어진 것. 고향도, 부모도, 피부색도, 인종도, 종교도, 언어도, 직업도, 살아갈 시기마저도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 무력한 자세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 인간, 이토록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


인간은 가끔 뜻대로 되지 않는 자연 속에서 보란 듯이 이를 거스르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이를 역행하는 순간을 발견해 내기도 한다. 자연이 낳은 인간과는 달리, 인간이 낳은 광대는 자연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자연이 내려준 인간다운 얼굴 위로 기괴한 얼굴이 그려진다. 자연스러운 발걸음과 자연스러운 손동작은 우스꽝스러운 발걸음과 우스꽝스러운 손동작으로 채워진다. 이 일상적이지 못한, 인위적이며 기괴한 것은 자연의 명령을 거슬러 가며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린 네 뜻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며, 네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것임을, 자연을 향해 외치는 우리의 당찬 포부인 것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이미 경험했던 세계로 뒷걸음칠 순 없다. 이미 늙음의 세계에 발 들인 자를 그가 기억하는 젊음의 세계로 다시 되돌아가게 할 수 없다. 이미 죽음에 당도한 자를 그가 기억하는 삶이 충만했던 세계로 다시 되돌아가게 할 순 없다. 이미 내 앞에 놓여, 내가 살아낼 수밖에 없는 생은 지금의 순간을 맞닥뜨리기 전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진 시간으로 되돌릴 수 없다. 그런 당연한 시간의 법칙을 거스르는 무언가를 목격한다면 자연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인간은 희망을 품게 된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이전으로 되돌려 다시 젊어지게, 다시 살아나게, 다시 선택할 수 있게, 자연의 법칙 앞에서도 당당히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다시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마치 시간을 다시 뒤로 감을 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다시 고쳐 쓸 수도 있는 영화처럼.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자연의 뜻을 거슬러 만들어낸 무언가로부터 품은 희망을, 자연의 뜻을 거스르는 순간의 발견으로부터 품은 그 헛된 희망을 처참히 짓밟히곤 한다. 자연의 지배 아래 놓인 현실은 네 꿈이 실현될 일 따윈 이뤄질 수 없음을 기어이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노인이 늙고 병들어가며, 누군가는 죽으며, 내 인생은 내가 원했던 적 없는 모든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결국 우린 이 모든 발버둥 앞에서도 자연의 힘 앞에 굴복하고 마는 존재라는 사실을 굳이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줌으로써, 경험케 함으로써.



그들 앞의 생을 기록하는 자의 마음


다름으로 인해 불쌍해진 이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는 무력한 이들. 이들의 인생을 다시 들춰보려는 마음을 생각해 본다. 다시금 꺼내본 이들의 순간을 기억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글로 담아내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해 본다. 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다 꺼내봐야 하며, 너저분하게 일단 꺼내놓고 본 이 모든 기억을 하나둘씩 정리해 나가는 마음을 생각해 본다.


글은 쉽게 쓸 수 있다. 그리고 글은 반대로 어렵게 써나갈 수도 있다. 글에 담아낼 이들을 향한 고마움, 애정, 존중(어쩌면 분노)이 가득할 때, 글을 통해 드러내려는 나의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아니하고 오히려 저 밑바닥까지 굴을 파고 내려갈 만큼 깊어져 있을 때 글쓰기는 어려워지고 만다. 글을 통해 밖으로 노출한 모든 것들 앞의 생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특별하여 불쌍해진 사람들과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한 채 무력해진 사람들에게도 왜곡 없이 존중으로, 관심으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때면 글쓰기는 그만큼 어려워져 버린다.


불쌍한 사람을 위한 글을 쓰려던 자는 불쌍한 이들 앞의 생, 이들 앞의 비극에 대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드러난 불쌍한 이들의 생은 분명 비극적이다. 책 속에 담긴 이들 앞의 생은 모든 것이 나아지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그러나 글을 써 내려간 자는 이들 하나하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불쌍한 이들의 특이함 속에서 더 어려운 이를 위하려는 따뜻한 마음을 찾아내고, 자연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도 지속되는 사랑의 마음을 찾아낸다. 불쌍한 이들의 모든 불쌍함과 모든 따뜻한 마음을, 그들 앞의 생을 기억해 내고 기록한다. 글을 쓴다는 건 나의 진정어린 마음을 담아낸다는 것. 그 진심을 어렵게 끄집어내고, 정리하고, 세상에 드러낸다는 것. 불쌍한 이들을 위해 글을 쓴 자는 이 모든 불쌍한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분명 그들을 향한 그의 마음은 진실될 것이다. 그들의 생을 기억하고 어렵게 글로써 기록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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