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모드, 때론 작가 모드>
나는 사실 창의적인 일을 할 때 가장 감각이 집중되고 행복감을 느낀다.
요즘은 프리랜서 웹툰 일이 없어서 정기적으로 창작을 할 일은 없지만 내 정신 건강과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창작 활동이 꼭 필요하므로 오늘도 할리땡으로 기어 나왔다.
내 적성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인데, 하루 중 나의 주 업무는 가사와 육아로, 창의적인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여기서 오는 괴리감은 나를 거의 다중인격급으로 힘들게 만든다.
이제 아이들이 조금 크기도 했고, 남편의 일도 프리랜서에 가깝기 때문에 예전보다는 할리땡에 자주 출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이 프리랜서라 뭔가 집안일을 함께 할 것 같은 이미지 일 수 있겠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예상과는 다른게 남편님이 점점 잘나가는 프리랜서가 되어가고 있어서 어찌나 바쁘신지.
바깥 일이 없는 날에도 컴퓨터 앞에 꼼짝없이 앉아 본인 일에 푹 빠져 있는 남편에게 양심 상 집안일을 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할리땡 매일 출근'이 이상적인 나의 목표지만, 많아야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가고 있다.
라고 한다면 큰 오산이다.
창의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가사와 육아와 글과 그림을 그리는 일을 병행하는 삶이란 나에겐 지킬 박사와 하이드 급의 정신의 분열이 느껴지는 일이다.
예전부터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뭔가 단순화된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는데, 집안일은 반복 단순 작업의 끝판왕이었다.
집안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합리적이고 단순하게 처리할수록, 숙달이 되면 될수록 빠른 시간에 간단하게 끝낼 수 있다. 게다가 여러 개의 일을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음으로써 짧은 시간 동안 수적으로 많은 성취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십수 년 동안 독박 육아에 독박 살림을 누구 못지않게 정말 열심히 했다. 그렇지만 난 아직도 집안일이 버겁고 익숙해지지 않았고 그 어떤 성취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요리는 어느 정도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라서 즐겁게 하고는 있지만, 식사 후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할 때는 이런 생각이 든다.
또 설거지를 끝내고 키친타월로 바닥의 흥건한 물기를 닦을 때는 설거지를 끝낸 개운함이 아닌 이런 생각이 든다.
'왜 나는 바닥을 기어 다니며 물기를 닦고 있을까?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 이렇게 바닥을 안 닦아도 되는 삶을 살 수는 없나? 이 세상에는 평생 한 번을 바닥에 쭈구리고 앉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가까운 곳에 저의 남편이 있네요)
바닥의 물기를 닦는 일은 정말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빨리 닦으면 1분이 안 걸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런데 왜 나는 많은 집안일 중에 그 1분이 가장 힘들까? 10년을 넘게 닦으면서도 왜 그 간단한 일이 익숙해지고 쉬워지지 않을까? 왜 아무생각 없이 후딱 해치우지 못할까. 정말 그 짧은 시간을 말이다.
어떤 이들은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 것이다. 익숙해지면 별일도 아닌 그 단순하고 쉬운 일들을 하고 좋은 집에서 공짜 밥 먹으면서 일생을 돈 벌 걱정 없이 편하게 사는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그렇지만 나는 그 단순하고 쉬운 일들을 하고 공짜 밥을 먹고 소파에 편히 누워 드라마를 볼 때 보다 하루 종일 밥대신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고도 배가 고픈지 모르고, 몇 시간씩 창작의 고통으로 머리를 쥐어뜯을 때가 훨씬 행복하다.
할리땡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은 내 현재의 삶을 잊게 만든다.
그 시간의 난 누구의 엄마도 아니고, 누구의 아내도 며느리도 아니다.
그냥 나일뿐이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도 너무 좋다.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집에도 안 가고 영원히 창작을 할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창작을 할 때의 그 감정, 감각, 생각 그 모든 것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엄청난 것들을 마구마구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애써 만든 나는 '신기루'이다.
아이들과 남편이 있는 나의 일터로, 나의 본분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난 다시 평범한 주부가 된다.
글 한 편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은 너무 뿌듯하다. 내 스스로가 대견하고 칭찬해 주고 싶다. 오랜만에 머릿속이 깨끗해지고 가슴의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집안 일과 육아로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가정에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도망칠 수는 없다.
성실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볼 때면 삶이 감사할 때도 많다.
그렇지만 그게 진정한 내 행복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집과 할리땡, 주부 모드와 작가 모드 사이에서 온 오프 스위치를 잘 켜고 꺼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한동안 집에서 집안일을 하느라, 또 반항심이 한창인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느라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탈탈 털리면 작가 모드의 스위치를 켜기 힘들고, 또 작가로서의 나의 모든 감성을 끌어모아 한 편의 작업을 끝낸 후 창작 욕구가 극에 달했을 때 다시 주부 모드를 켜고 현실로 복귀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
굉장히 창의적인 일과 굉장히 단순 반복적인 일의 삶 속에서 나의 정신은 오늘도 두 가지로 분열된다.
둘로 분리된 나의 인격이 하나로 합쳐지는 날이 언젠가는 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