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북쪽에는 불암산이란 산 하나가 있습니다. 높이가 500m쯤 되니 아주 높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그리 낮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산입니다. 불암산의 산세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습니다. 이 산의 서쪽은 서울시 노원구입니다. 산을 타고 동쪽으로 넘어가면 경기도 남양주가 나옵니다. 불암산은 서울의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인 셈입니다. 불암산 능선을 따라 남쪽 끝자락으로 내려오면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바위틈을 비집고 이끼가 자라듯 이 마을은 산자락과 산자락 사이를 파고든 모양새를 지녔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의 이름은 '백사마을'입니다.
백사마을 전경. ⓒ<104마을; 중계본동 산 104번지>(2012), 327쪽
백사마을, 이름에서 다소 황량한 느낌이 듭니다. 이름에는 연유가 있기 마련인데, 마을 입구 주소(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104번지)에서 땄다는 말도 있고, '허허벌판에 세운 마을'이란 뜻에서 '백사(白沙·흰모래밭)'를 붙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얼핏 든 그 느낌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듯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원래 이 땅에는 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있는 집들이 무척 초라합니다. 350채 정도 있는 집들은 대부분 매캐하게 가루가 날릴 듯한 슬레이트 지붕과 거친 시멘트 블록이 감싸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세월의 흔적이 짙기도 하고요.
이 풍경은 백사마을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고도 불리는 이유입니다. 마을은 전체적으로 잿빛인데, 누군가 그 잿빛이 너무 싫었는지 마을 어귀어귀에 색색의 벽화들을 그려놓았습니다. 그림과 대비돼 마을은 왠지 더욱 진한 잿빛을 띠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골목은 닥치는 대로 냈는지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어지러이 얽혀있고, 그 사이사이 조그만 터에서는 어김없이 상추와 고추 같은 작물이 푸릇푸릇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은 멀리서 보면 우중충한데, 다가가서 가만 들여다보면 환한 구석도 있습니다. '가까이 보아야 예쁘다'는 시인의 글귀가 떠오릅니다. 드론을 띄워 마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무채색 도화지에 초록빛 물감이 번지듯 점점이 찍힌 모습일 것 같습니다.
서울시 노원구 중계본동 104번지 일대 항공사진. 녹지에 파묻힌 곳이 백사마을. ⓒ카카오맵·국토지리정보원
그 백사마을이 곧 사라집니다. 백사마을의 땅을 가진 사람들은 1990년대부터 마을을 재개발하길 바랐고, 마침내 2021년 2월 재개발사업 계획을 행정당국이 허가했습니다. 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이제 마을은 거의 텅 비었습니다. 남은 건 헌 집을 부수고 새 집을 짓는 일뿐입니다. 이 마지막 달동네도 20층까지 쭉쭉 뻗은 아파트 단지가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낡은 동네를 헐고 새 동네를 놓는 일은 전혀 특별할 게 없습니다만, 그런데 이 백사마을 재개발에는 뭔가 남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같은 백사마을인데 그 땅을 7:3으로 갈라 따로 개발합니다. 7을 차지하는 큰 땅에는 2000세대 가까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섭니다. 요즘 사람들이 선호하는 유명 건설사의 '브랜드 아파트'가 될 겁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재개발의 전형입니다. 그럼 나머지 3을 차지하는 작은 땅에서 하는 재개발에 뭔가 다른 게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아파트를 짓지 않고, 최고 4층짜리 저층주택 500여 세대를 짓습니다. 4층이면 우리가 흔히 '빌라'라고 부르는 주택 층수입니다. 먼 훗날 재개발이 끝난 뒤 백사마을을 찾으면 입구에서 왼쪽은 고층아파트, 오른쪽은 저층주택으로 나뉜 풍경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 재개발사업, 왜 이렇게 하는 걸까요? 뭔가 유별난 게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작은 땅에서 하는 재개발사업을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백사마을 주거지보전사업'입니다. '주거지'를 '보전'한다니, 아까 재개발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재개발의 목적은 원래 있던 주거지를 없애고 새로 다지는 것 아니었나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백사마을 재개발은 전체 부지를 7:3으로 나눠 큰 땅에는 아파트 단지를, 작은 땅에는 저층주택 단지를 짓는다. ⓒ서울시
이해가 안 가는 점은 또 있습니다. 백사마을 주거지보전사업에는 건축가 10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요즘 TV에도 건축가가 나와 집을 소개하고 동네를 거니는 프로그램들이 참 많은데, 이들 역시 모두 업계에서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작품 활동이 왕성한 건축가들입니다. 사실 이 건축가들은 이 사업을 10년 가까이 끌어왔습니다. 실력 있는 건축가의 시간이 10 × 10, 즉 100년이 투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업은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걸출한 건축가들의 재능과 시간을 이렇게 붙잡고 있는 걸까요? 발에 차이는 게 아파트인 나라에서 거의 'ctrl C, ctrl V'만 해도 아파트 단지 하나는 뚝딱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값비싼' 건축가들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할까요? 이런 의문이 드는 게 아주 당연합니다. 소위 '가성비'가 안 맞아 보이는 겁니다.
좀 더 들여다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더 많습니다. 이 건축가들이 공유했다는 이른바 <백사마을 디자인 가이드라인>1)이란 책자를 좀 볼까요?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디자인 스타일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을 것', '건축물을 독립된 개별 요소로 부각하지 않을 것', '공사비 상승을 부르는 외관 계획에 치중하지 않을 것'…. 첫 장부터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습니다. 이건 그냥 디자인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실컷 디자인을 업으로 삼는 건축가들을 10명이나 불러놓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건축가들 중 10년 동안 이 사업에서 이탈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해하는 걸 넘어 이제는 신기할 지경입니다.
이렇듯 이 사업은 '재개발'인데 뭔가를 '보전'하고, '디자인'을 하면서도 '개성'을 감추라고 요구합니다. 모순으로 가득 차 보이는 백사마을 주거지보전사업은 대체 무엇일까요? 기존 터전을 갈아엎는 게 목적인 재개발에서 무엇을 보전하고, 왜 보전해야 하는 걸까요? 건축가들에게 그 답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1) 이민아, 2014년 1월, <중계본동 백사마을 주거지보전구역 디자인가이드라인 수립용역>, 서울특별시 용역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