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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Oct 26. 2022

'힙지로'의 교훈

3-3. 도시의 낡은 지역이 오히려 새로울 수 있다

하지만 도시의 야심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여전히 재정비촉진지구로 묶여 있는 세운상가 주변에는 최근 유령이 다시 출몰하고 있습니다. '뉴타운'이란 유령이요. 뉴타운의 핵심은 역시 가공할만한 규모와 속도전입니다. 1㎞에 걸쳐 2만명의 생업이 걸린 땅을 6년 만에 개발하겠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다시 소환하며 '상전벽해'1)를 부르짖습니다.


□ 오세훈 시장은 30일(토) 토지이용규제가 전혀 없는 ‘화이트사이트(White Site)’를 적용한 유연한 개발로 싱가포르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마리나 원(Marina One)’에서 “낙후된 서울 도심을 유연하게 복합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중략) 

□ ‘마리나 원(Marina One)’은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마리나베이에 위치한 주거·관광·국제업무 복합개발단지다. 싱가포르는 계획단계부터 용도지역을 특정하지 않고 창의적이면서도 유연하게 개발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전히 풀어주는 ‘화이트사이트’를 적용해 복합개발을 전폭 지원했다. 용적률 1,300%(지하 4층~지상 34층)의 초고밀 복합개발과 마리나베이의 풍광과 잘 어우러지는 유선형의 수려한 건축 디자인이 가능했다. 

(중략)

□ 서울의 심장부지만 노후하고 활력이 떨어진 서울 구도심에 주거를 비롯해 업무, 산업, 문화, 관광, 교육, 녹지 등 다양한 용도가 혼합된 초고층 복합단지가 들어서게 된다. 

(중략) 

□ 그동안 과도한 규제와 보존 위주 정책으로 성장이 정체된 구도심의 도심 기능을 끌어올려 서울의 글로벌 도시경쟁력을 견인할 거점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목표다.


정말 다양한 수사를 동원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싱가포르처럼 초고층 복합단지를 건설하면 글로벌 도시경쟁력이 향상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한 가지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고층 복합단지라는 '형식'에 어떤 산업(예컨대, 금융 혹은 IT)을 유치할지에 관한 '내용'도 없이 곧장 글로벌 도시경쟁력이 커진다는 '전망'으로 연결하는 논리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세운지구에 존재하는 제조산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영화 <식스센스>(1999)의 주인공(브루스 윌리스)처럼 유령이 스스로 유령인지도 모르고 현실 속 살아있는 존재들을 유령 취급하는 꼴입니다.

세운지구에 걸려있는 재개발 반대 현수막. ⓒ허남설

'용적률2) 1300%'의 고밀도 싱가포르 건축물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는 시각 또한 문제적입니다. 그 용적률을 대체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없이, 건물만 덜렁 세워놓는다고 경쟁력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잠재된 수요가 있다고 장담하기도 어렵습니다. 요즘은 온라인 상거래와 재택근무 등 유연한 근무 형태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 산하 기관에서 소매점포의 경우에는 2045년쯤 지금의 30% 정도만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온 바 있습니다.3) 무엇보다, 이제는 '천만 서울'이란 말을 쓸 수 없게 됐을 정도로 우리는 인구 감소가 대세가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통계청 인구추계자료에 따르면, 서울 인구는 2020년 기준 950만명에서 2045년 900만명으로 줄어듭니다.


사실, 이런 대전제를 굳이 끌어들일 이유도 없습니다. 세운지구의 현재만 들여다 봐도 과연 새로운 재개발 계획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행정가들이 그토록 추구하고 싶은 '복합단지'가 초고층 형태만 아닐 뿐 이미 세운상가와 그 주변에 구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풍경을 이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세운상가에는 건물 양쪽에 날개처럼 달린 3층 높이 '공중보행로'가 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은 세운상가를 설계할 때, 이런 공중보행로를 세운상가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상가, 신성상가, 진양상가에도 설치해 종묘부터 남산까지 차량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고 걷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건설비용, 공사지연 등 문제에 부딪쳐 일부 상가에 공중보행로를 짓지 못하게 되면서 김수근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2015년 서울시가 세운상가 재생사업을 시작하면서 50여년 만에 공중보행로 연결 사업을 재추진하였고, 최근 공중보행로가 완성돼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운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를 잇는 350m 길이 공중보행로에서는 독특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음향기기 수리업체와 철학전문 책방, 고무·실리콘 패킹업체와 카페·술집, 조명·전자기기 판매업체와 갤러리가 교차합니다. 맞은편 컨테이너 창업공간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선 제품·인쇄 디자이너들이 일합니다. 세운상가 주변의 기존 제조업 생태계를 강조한 '메이커 시티(Maker City)'를 내건 재생사업의 결과입니다. 재생사업은 이 곳의 제조업자들에게 '장인' 같은 호칭을 부여하며 그들의 기술력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정말 생태계의 한 축을 차지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했습니다. 공모를 통해 창업공간에 청년들을 유치했고, 그들의 아이디어와 장인의 기술력이 결합한 제품들이 탄생했습니다. 이런 성과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도시기술장' 행사를 여는 날에는 세운상가 공중보행로가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2021년 11월27일 세운상가 공중보행로에서 열린 ‘도시기술장’에서 시민들이 세운상가 내 기술자·청년창업가들이 제작한 제품들을 둘러보고 있다.ⓒ세운협업지원센터 페이스북

이렇게 새 것과 오랜 것, 먹고살기 위한 것과 즐기기 위한 것이 뒤섞인 풍경에서 '힙지로'란 말이 나왔습니다. 세운상가뿐만 아니라 세운지구에 있는 수천개의 제조·인쇄업체 사이사이마다 청년들이 즐겨찾는 카페, 식당, 서점, 잡화점이 들어서면서 을지로는 언젠가부터 힙지로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왜 을지로와 세운상가를 찾기 시작했을까요?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세운·청계·대림상가에 자발적으로 입주한 업체는 2016년 8개에서 2020년 94개로 계속 늘었다고 합니다. 디자인·문화예술·식음료 등 청년 창업자·종사자가 주류인 업종이 절반을 넘습니다. 접근성 등 입지는 좋은데 임대료는 다른 도심부에 비해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이 곳의 낙후된 환경이 되레 새로운 세대를 부른 셈입니다. 산업 생태계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조사를 한 연구자들은 "초기엔 문화·예술, 식음료 등 새로운 업종이 입주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존 산업과 유사하거나 이를 지원하는 디자인, 도소매 업종이 입주했다"며 "새 업종과 기존 업종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풍경을 시시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대림상가 남측에 있는 '을지트윈타워'를 한 번 보겠습니다. 2019년 들어선 이 20층 높이 건물에는 대우건설과 BC카드 사옥이 입주해 있습니다. 대기업이 두 곳이나 들어오니 근처 유동인구가 급속도로 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운상가 남측 청계천변에는 2023년이면 430여세대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섭니다. 앞서 나온 공구상인 홍씨의 동료 상인들이 쫓겨난 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건물들은 재개발의 결과입니다. 다만, 뉴타운 방식의 세운재정비촉진계획처럼 도시에 원래 있는 것들을 단번에 일소하고 생겨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점진적인 방법으로 자리잡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천천히 가는 재개발의 틀을 만든 것 역시 서울시입니다. 2014년 서울시는 실현 가망이 없는 통개발 계획을 결국 폐기했습니다. 상전벽해를 이룰 것만 같았던 원래 통개발 계획은 원래 세운상가 앞에서 종묘를 마주보고 있던 현대상가를 철거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서울시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를 '재정비촉진지구'로 유지하되 개발구역을 세운1~6구역 6개에서 171개로 자잘하게 쪼갰습니다. 그리고는 개별 구역마다, 필요하면 구역을 서로 합쳐 재개발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 결과 을지트윈타워 같은 신생 구조물들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처럼 굳이 도시를 깔끔하게 밀고 새로 짓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 자본의 필요성에 따라 낡고 작은 건물은 새롭고 큰 건물로 대체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나무가 스스로 자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늙고 썩어가는 가지를 당장 쳐내고 싶겠지만, 그 가지는 재빠르고 큰 새들에 밀린 약하고 어린 새들의 안식처가 됩니다. 수명을 다한 가지는 때가 되면 꺾이고 줄기에서 새 가지가 자라고요. 도시도 나무처럼 스스로 자랍니다. 한 번에 싹 밀고 '그림 같은 집(도시)'을 짓겠다는 환상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작고 점진적인 개발'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다양성과 큰 활력을 가져오는지 을지로와 세운상가의 현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운상가 옥상 입구에서 바라본 을지로 풍경. ⓒ허남설

1) 오세훈 서울시장은 2021년 11월18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의원님 지금 사진까지 보여주시면서 세운재정비촉진지구에 대해서도 심층적인 분석을 해 주셨는데 사실 세운지구를 보면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10년 전에 제가 퇴임할 때 10년 정도 원래 제가 세웠던 계획대로만 꾸준히 실행을 했더라면 지금 서울도심의 모습은 완전히 상전벽해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지난 8월 초로 기억이 되는데 제가 세운상가 위에 올라가서 종로2가부터 동대문까지, 종로-청계천-을지로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정말 참혹합니다. 저렇게 10년 동안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도시행정을 했던 서울시를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말문이 막혀서 한동안 말을 못 했습니다." 

2) 한 건축물의 각 층 바닥 면적을 합해 대지 면적으로 나눠 백분율로 표시한 값이다. 예를 들어, 10층 높이 건물의 각 층 바닥 면적이 300㎡에 대지 면적이 500㎡라면 용적률은 300(㎡)×10÷500(㎡)×100(%)=600%가 된다. 건축물의 부피를 뜻한다고 보면 된다.

3) 길현기·구자훈, 2021년 9월, <도시재생사업의 신규입주업체 유형별 특성 및 거점시설 만족도의 영향요인에 대한 연구>, 서울도시연구 제22권 제3호, 41~57쪽

4) 허자연·김묵한·김상일·박희석·이가인, 2020년 11월, <서울시 상업공간 수급현황과 입지행태 변화>, 서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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