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종삼'이라 불리던 곳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즉 세운상가 일대는 '규모와 속도전'의 도시개발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 역사는 세운상가 일대가 한국 근현대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반복됐습니다. 개발 계획 앞에서 그 땅에 실존하는 삶은 늘 그다지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지금의 세운지구에는 원래 민가가 많았다고 합니다. 왕조를 상징하는 공간인 종묘와 마주보고 있긴 하지만, 별다른 특색은 없는 주거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일본이 식민 지배의 야욕을 불태워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세운지구의 운명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초반 진주만 공습에 성공하며 금방이라도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듯 보였지만, 미국의 반격이 거세지며 전세는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44년, 급기야 제주도와 부산 근처에도 미군 전투기가 출현하자 일제는 서울 방공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도시소개대망’을 발표합니다. 폭격으로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에 일부러 공지를 조성하는 계획입니다. 이에 따라 세운지구에는 폭 50m, 길이 1,200m에 이르는 소개공지를 만듭니다. 자연히 그 땅에 있던 민가들은 강제퇴거 대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 소개공지가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전쟁은 끝나버렸습니다.
소개공지는 제대로 정비가 안된 채 용도가 딱히 없는 빈 터로 남았고, 그 곳에는 난리통에 빈민과 피란민이 모여들어 무허가 판자촌을 이뤘습니다. 워낙 가난한 사람들인지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을 파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성매수자들 사이에서 이 곳은 '종로3가'를 줄여 '종삼'이라는 은어로 불렸습니다. 세운지구는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였습니다.
지금의 세운상가군(세운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상가, 신성상가, 진양상가를 말합니다. 세운상가 앞에는 원래 종묘를 마주보고 현대상가가 있었습니다. 현대상가는 2009년 철거됐습니다.)은 1967년 서울시가 펼친 '나비작전'의 결과물입니다. 여기에서도 '불도저'라고 불렸던 행정가, 김현옥 서울시장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운지구의 무허가 건축물을 모조리 철거하는 나비작전을 편 다음, 사창가는 나중에 '미아리 텍사스'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옮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 당시 군부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상징하는 현대적인 건축물을 건설할 계획을 세웁니다. '1세대 근대건축가
'로 불리는 건축가 김수근이 공중보행로와 공중정원, 주상복합 등 입체도시 개념을 담은 세운상가군을 설계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세운상가군 내 현대식 아파트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아파트 아래 상업시설은 '쇼핑의 메카'였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강남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세운상가 일대 호황도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의 중심축이 강남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당시 군부정권은 안보 등 목적으로 강남으로의 인구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 강남으로 학교를 옮겨 학군을 보강하는 조치를 취한 반면 강북엔 유흥·상업시설의 신설·이전을 제한하고 각종 건축 규제를 강화했습니다. 이때부터 세운상가 일대는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세운지구가 고급 주거지와 인기 상업지로서의 명성을 잃었다고 해서 고유의 생명력까지 잃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운지구의 역사에서 사회 부유층의 관심을 받은 시간은 아주 잠깐에 불과합니다. 세운지구의 정체성은 그 무엇보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자리 잡은 제조산업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나중에 용산에 영광을 넘겨주기는 했지만, 1980~1990년대 전기·전자 제품 판매지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누적된 기술력 때문에 "세운에서는 탱크와 미사일 빼고 다 만든다"는 말도 유행했습니다. 세운지구에는 아직 8000여개 사업체에서 약 2만명이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