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산업 생태계와 문화유산을 무시한 계획, 그 결말은
그럼에도 세운상가 일대 산업 생태계는 아직 불안정합니다. 이곳이 '세운재정비촉진지구'란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이름은 도시계획상 여전히 '정비(재개발)'를 '촉진'해야 할 지역으로 취급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헌 집 부수고 새 집 짓는 정비를 무조건 마다할 이유란 없습니다. 도시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쇠락하기 마련이고, 달라진 주거 양식이나 산업 구조에 맞지 않은 경우 새롭게 고쳐 쓸 필요가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이란 말도 있으니까요.
다만, 이 역시 현존하는 낡고 오래된 것들을 마냥 무시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세운지구에는 실물경제를 구성하는 산업과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8000여개의 사업체와 이에 엮인 협력업체들, 2만여명의 종사자와 이들에게 의존하는 가족들을 고려하면, 그 산업은 결코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구조를 불과 몇 년 만에 일소하는 개발 계획은 애초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세운지구는 축구장 40개를 합친 것만 한 어마어마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그런 불가능한 규모와 속도의 개발을 지향했고, 결과적으로 처절한 실패를 자초했습니다.
세운상가 주변이 세운재정비촉진지구가 된 때는 2006년. 그 이름은 이곳도 당시 거세게 불었던 뉴타운 바람을 피하지 못했던 흔적입니다. 이전에도 세운상가 일대를 재개발하는 계획은 1980년대부터 꾸준히 나왔습니다. 1988년 세운상가 재개발사업계획, 1994년 도심재개발기본계획, 2000년 도심부관리기본계획, 2002년 도심부 발전계획, 2004년 도시및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 그리고 2009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계획…. 굵직한 것들만 추려봐도 이 만큼입니다. 세운상가 주변의 제조산업은 도심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1960년대부터 이미 '도심 부적격 업체'란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도시행정가와 개발업자들은 현재 세운지구의 모습인 '저층 제조업 지대'와는 상반된 청사진을 끊임없이 그렸습니다. 예컨대, 1995년 종로구 도시기본계획에는 세운상가 주변을 '초고층 인텔리젼트 빌딩'으로 재개발한다는 목표가 담겨 있습니다.1)
그런데 그 많은 계획 중에서도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유독 차원을 달리합니다. 2002년 도심부 발전계획에서 이미 종로부터 충무로까지 이르는 지역을 '통개발'한다는 발상이 나왔지만, 2009년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여기에 '속도전'까지 더했습니다. 우선 세운상가 주변을 세운1구역부터 세운6구역까지 6개 구역으로 나누고 개발 계획을 3단계로 구분했습니다. 당시 이미 사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던 1구역은 2009년 내로, 2~5구역은 2012년까지, 6구역은 2015년까지 재개발을 마친다는 과감한 계획이었습니다. 개발 범위는 종묘부터 남산까지 1㎞에 걸쳐있는데, 그중 반을 3년 안에, 나머지 반은 또 3년 안에, 그렇게 해서 6년 만에 재개발한다는 것입니다.
□ 세운재정비촉진사업의 시행으로
○ 종묘와 남산을 연결하는 폭 90m, 길이 1㎞의 세운녹지축 복원 및 청계천의 접근체계 보완으로 보행접근이 가능하도록 계획하여 청계천의 수경축과 세운녹지축,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를 연계한 세계 수준의 도심 관광명소로 조성하게 된다.
(중략)
□ 서울시는 세운재정비촉진사업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도심 녹지축의 조성과 낙후된 도심 재개발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도심(세운지구)을「도심속의 신도심」으로 재창조하고 역사문화와 경제, 첨단, 디자인이 어우러진 활력 있는 서울로 조성해 나아갈 예정이다.2)
녹지축, 관광명소, 신도심…. 다 좋은 말들입니다. 헌데, 서울시의 계획에서 세운지구의 제조산업에 대한 이야기는 눈을 아무리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낙후된 도심'이라고 규정하며 재개발의 시간표만 제시했을 뿐입니다. 왜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을 원래 그곳에 없던 것처럼 치부하는 걸까요?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을 입안한 사람들의 눈에는 세운지구의 제조업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요?
시작은 야심 찼지만 끝은 초라했습니다. 이 실패는 재개발 계획을 세우며 세운지구의 제조업을 무시한 것과 크게 관련은 없었습니다. 세운지구 내 수많은 제조업자가 개발 계획에 반발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누가 발을 걸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엎어지는 꼴을 당했습니다. 앞서 창신동 뉴타운이 엎어진 과정에서 우리는 토지 등 소유자 수에 비해 재개발 후 새로 생기는 아파트 세대 수가 부족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던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세운재정비촉진계획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애초 재개발 계획이 그 넓은 땅에 얽혀있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간과한 채 수립됐던 것입니다.
가령, 상가 겸 주택으로 지어진 세운상가 안에는 한 집 안에서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서 지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득실했습니다. 개발 이익이 보이는 곳은 어디든 이런 사람들이 꼬이기 마련입니다. 또, 재개발 구역 한 개당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그 안에 지분을 가진 소유주도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이 재개발 후 가져갈 이익을 조정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세운상가에 달랑 방 한 개를 갖고 있는 사람이든 세운상가 옆에 공장이 있는 몇십평짜리 토지를 가진 사람이든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아귀다툼을 벌였습니다. 물론, 이익 앞에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투기꾼들의 행태는 옹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총칼을 앞세우지 않고서야 그걸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그 덩치를 더 키우고 속도를 재촉하면서 내재된 문제를 더 키웠습니다. 애초 계획이 잘못 설계된 것입니다.
지금 세운재정비촉진지구를 가보면 세운상가 동측의 세운4구역이 통째로 재개발 중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의 다른 구역들이 공구상, 기계공, 인쇄공들로 채워졌다면 여기에는 시계공들이 모인 '예지동 시계골목'이 있었습니다. 2021년 말부터 건물을 철거하기 시작하면서 시계공들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제 이곳에는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짓는 18층 높이 주거·업무·숙박·판매 복합건물이 들어서게 됩니다.
세운4구역은 얼핏 보면 재개발이 착착 진행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잘 들여다 보면 역설적으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세운4구역 재개발 계획은 2004년부터 추진됐습니다.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터를 닦기까지 18년이 걸렸습니다. 개발이 완전히 끝나려면 3~4년은 족히 더 걸릴 겁니다. 그런데, 세운4구역만한 블록이 7개나 있는 세운지구 전체를 6년 만에 재개발한다고요? 처음부터 꿈같은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세운지구 같은 거대 공간을 머릿속에서만 그린 조화롭고 통일된 구상으로 단기간에 개조할 수 있다는 환상,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세운4구역 통개발 계획을 약 20년 만에야 겨우 실현할 수 있었던 데는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바로 강북 도심의 역사성입니다. 조선왕조까지 한양, 즉 서울의 범위를 규정했던 4대문과 한양도성이 있기 때문에 한강 이북은 강남 지역처럼 개발이 자유롭지 않고, 또 자유롭게 풀어줄래야 풀어주기도 어렵습니다. 현재의 요구에 따라 개발하더라도, 과거의 문화유산의 가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합니다.
세운4구역 맞은편에는 종묘가 있습니다. ‘종묘사직’ 할 때 그 종묘입니다. 600년 조선왕조의 신주(죽은 왕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이 종묘가 종로를 사이에 두고 세운재정비촉진지구를 마주 보고 있습니다. 종묘 담장을 기준으로 삼으면 가장 가까운 거리가 한 200m쯤 됩니다. 유네스코의 공식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Sites)는 2006년 세운지구를 너무 높게 개발하면 종묘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해칠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최근 일어난 '왕릉뷰 아파트'3)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한 왕의 묘를 두고서도 큰 논란이 일었는데, 한 왕조를 기리는 공간인 종묘를 두고 일어난 논란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당시 서울시와 SH는 자문단을 꾸려 세운4구역의 설계안을 조정하고 또 조정하는 일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앞서 둘러본 창신동과 다산동도 같은 이유로 개발 행위에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두 곳 모두 한양도성 일부를 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양도성 주변으로 조성된 성곽길은 젊은이들도 즐겨 찾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성곽길을 거닐 때 사방에 보이는 게 온통 고층 아파트의 벽면이라면 어떨까요? 아마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서울시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변은 아파트 등 공동주택을 짓더라도 높이를 최고 4층 내지는 7층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개발에 대한 제약, 개인 재산권의 침해라고 여겨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훼손되면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유산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보기에 썩 만족스럽지 않은 산동네와 구도심의 풍경, 거기엔 이렇게 그 나름의 복잡한 맥락이 존재합니다. 도시는 백지가 아닙니다. 고층 아파트와 빌딩에 대한 선망도 공동의 부, 공동의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추구해야 합니다.
1) 서울특별시, 2009,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그 과정의 기록>, 35~36쪽
2) 서울특별시, 2009.3.19., <세운재정비촉진계획 결정, 본격 사업착수>, 보도자료
3) 2021년 9월13일 문화재청이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원종(1580~1619) 무덤인 장릉을 바라보고 지어진 검단신도시 일부 아파트가 경관을 해친다며 공사중지를 명령한 사건이다. 2022년 7월8일 법원은 이 아파트 단지가 장릉 등 역사문화환경 보존 범위인 200m 바깥에 있다는 등 이유로 공사중지 명령이 무효라고 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