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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소금
Sep 21. 2024
카레 만들다 벌어진 초장 대첩
인스타그램이었나.
전기밥솥으로 카레를 만드는 과정을 본 적이 있다.
전기밥솥에
토마토 통째로 하나
,
양파 통째로
하나,
고기 적당히
넣고
물
가득
넣어 취사를 눌러준다.
취사가 한 번 끝나면 재료들은 푹 익어져 있다. 그때 밥솥을 열어 고체 카레를 넣어준다.
그렇게
다시
취사를
누르면
카레가
완성되어 있다.
나도 요리 고수처럼 척척 넣어서 해보고 싶어서 고체 카레를 샀다. 하지만 굳이 찾아먹지 않았다.
카레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고, 이를 남편도 알기에 먼저 카레를 찾지 않았다.
어느 날, 장을 봐왔지만, 뭔가 부족하다 싶은 날, 드디어 찬장에 숨어 있던 고체 카레를 꺼냈다.
남편은 토마토를 싫어하니 넣지 말자고 했고, 전기밥솥에 토마토를 안 넣을 생각을 하니, 그냥 냄비에 만드는 게 낫겠다 싶었다.
사실 카레를 만들어본 적이 없어서 전기밥솥이 자신이 없기도 했다. 요리 고수가 되려면 기세가 필수인가 보다.
냄비에 적당한 크기로 자른
감자,
당근,
양파를
넣어
볶아준다.
어느 정도 재료들이 익었다 싶을 때 물을 적당량 넣는다.
그리고 재료를 푹 익혀준다. 특히 감자가 잘 익어서 뭉개지길 기다린다.
카레의 눅진한 소스와 감자의 포슬포슬함이 섞여 꽤 되직한 카레가 만들어지리라 기대해 본다.
어릴 때 엄마는 종종 카레를 한솥 만들어두곤 했다. 그럼 나의 형제들(오빠와 남동생)은 큰 대접에 흰쌀밥을 듬뿍 담아 카레와 밥을 함께 먹었다.
반면 나는 카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카레만 빼고 밥을 먹었다.
하지만 엄마는 지금도 가끔 '너 카레 좋아하잖아'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번에도 다른 형제들과 헷갈렸구나 싶어 '응, 맞아~' 하고 넘어간 적이 몇 번이나 있던지.
아니나 다를까 남편도 시어머님이 만들어둔 카레를 계속 끓여 먹었다고 어릴 적 추억을 얘기해 줬다.
남으면 내일도 먹어야겠다고 다짐까지 하면서 말이다.
카레는 인스턴트식품인데 꽤나 여럿 다양한 추억을 갖고 있는 음식이다.
감자가 푹 익었다. 이제 카레를 넣어준다. 두 명분이니까, 두 덩어리.
넣고, 저어준다. 감자를 으깨듯이 저어준다. 당근도 큰 건 조각조각 잘라준다.
아 맞다. 돼지고기.
그럼 그렇지. 오늘도 하나 빼먹었다.
카레에 넣으려고 잘게 썬 목살을 구입했건만.
남편은 따로 구워서 섞자고 했다. 역시 우리 남편은 고기를 내려놓지 못한다.
밥을 납작한 그릇에 예쁘게 담고, 완성한 카레를 위에 덮어준다.
마트에서 사 온 연어와 양념게장도 더한다. 남편은 연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그런데
먹다 보니
담아놓은
초고추장이
바닥을 드러냈다.
남편은 나에게 초고추장을 가져다 달라했고,
나는
직접
갖다
먹으라고 했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
에게
섭섭했다. 섭섭을
직감적으로
감지했다고나 할까. 일방적인 섭섭이라면 한쪽이 사과할 텐데, 이건 동시에 섭섭한 거
였다.
나는 왜 초고추장을 먹고 싶은 사람이 직접 가지고 오지 못하는 건지 의문이었고,
남편은 내가
냉장고와 더
가까운데,
왜
못 가져다주는지 의문이었다.
그깟
초고추장이
뭐라고.
우리는 목소리 높여 자기 스스로를 방어하고,
섭섭함을 토로했지만,
끝은
웃음으로 무마
했
다.
어디선가 그런 영상을 봤다.
부부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고 말한다.
"내가 맞았고, 당신이 틀렸어. 그런데 괜찮아."
영상 속 부부는 서로 토닥토닥 안아준다. 우리도 영상대로 따라 해 보기로 한다.
나는 아직도 초고추장을 직접 가져다 먹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밥을 먹다가 초고추장을 가져다 달라고 한 남편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냉장고와
가까운 내가
초고추장을
가져다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 초고추장을 가져다주지 못한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괜찮다.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내 생각을 온전히 주입시키지 못했지만, 괜찮다.
어느 정도의 감정은 회피하고, 묻어두고 사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엄마가 내게 '너 카레 좋아하지?'라고 물을 때 '나 카레 안 좋아해!'라고 말하지 않고
'응, 맞아~'라고
뭉개버리는
것처럼.
뭉게뭉게 뭉게구름으로 살아가자.
돼지고기를 따로 구운 덕에 엄청 많이 들어갔다. 돼지고기 카레가 정확한 이름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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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소설, 시, 희곡을 조금씩 건드려 봤지만 아직도 무엇을 써야 할지 잘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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