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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전쟁

by 은가비

부모로 사는 일은 20년이 되었어도 어렵다.

산을 하나 넘으면 또 조금 높은 산이 나오고 그걸 넘으면 계속 더 높은 산을 넘어야 하는 일이라고 할까.


아이를 낳고 키우며 생명에 대한 경이와 감탄도 맛보았다. 작디작았던 아이의 자람을 보는 기쁨의 순간들로 빛나던 그 몇 년의 기억을 가지고 나머지 긴긴 평생을 버티는 게 아닐까 깨닫는 일이기도 했다.


육아를 통해 겸손해지고 쓰라린 인생의 진리를 배웠다. 열심히 한다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처절하게 체험하며 어느덧 육아 20년 차. 심한 저혈압이었던 나는 혈압상승도 덤으로 얻었다. 하하.


사춘기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마음이 힘들 때마다 이 외계인들이 내가 낳은 그 아이들이 맞나 싶어서 어릴 적 사진을 부적처럼 꺼내보곤 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웠던 순간이 있었지.’ 하고 견뎌내는 나날들.


특히 그 말캉하고 작은 몸이 나에게 안겨 어깨에 기대오던 순간들, 보드라운 살을 만지며 목욕시키던 때를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난다. 몸은 힘들었지만 하루하루 먹이고 씻기는 수고로움에 쑥쑥 자라는 것으로 보답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내 손길이 없어도 자라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스스로 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해서 내 육아 행복감이 정비례로 늘어나지는 않았다. 이제는 몸보다 마음이 힘든 일이 많아졌다.


그중 씻는 일에 대해 다른 부모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사춘기 자녀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너무 안 씻어서 문제인 경우와 너무 자주, 그리고 오래 씻어서 문제인 경우다. 우리 집은 후자에 해당한다. 안 씻는 아이들도 걱정이 되겠지만 반대의 경우도 심각하다.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하는 얘기나 매체에서 들려주는 조언은 사춘기가 그럴 때라고 이해하라고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가 싶어서 속이 터진다.


둘 다 한번 씻으러 들어가면 몇십 분은 기분이고 심하게는 한 시간 가까이 나오지 않는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대체 뭘 하는지 밖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한다. 핸드폰은 대체 왜 들고 들어간 것이며 시간 낭비에 물 낭비 주범인 놈들이 내 자식이라니 속이 끓어오른다. 지구야, 내가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사정이 이러니 매월 우리 집은 같은 평수 다른 집에 비해 월등하게 난방비와 세대 급탕비가 많이 나온다. 아무리 여러 번 이야기 해도 고치지 않는 아이들. 본인들이 물값을 내는 나이가 되면 정신 차리려나. 3살 터울이 나는 남매는 올해로 아들이 20살, 딸은 17살. 이런 상황이 몇 년 동안 지속되었으니 그동안 낭비된 금액이며 우리 부부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극심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남편이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새해를 맞이하여 특단의 조치를 생각했다. 대중목욕탕에 설치된 절수형 샤워기 헤드를 떠올린 것이다. 손잡이 부분에 달린 스위치를 눌러야만 물이 나오는 샤워 헤드를 아시는지. 그걸 달아놓으면 물이 하염없이 나오지는 않을 테고 악력으로 누를 때만 급수가 되니 손이 아파서라도 오래 씻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예상은 적중했고 샤워기를 바꿔 설치한 날 이후로 아들의 샤워 시간은 대폭 줄었다. 그리고 헬스장에서 씻고 오기도 했다. 아이들의 원성을 들으며 우리 부부는 작전이 성공했다고 키득거렸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며칠이 지나니 원성이 잠잠해졌다. 적응한 것일까.

-여보 잠깐만. 이 녀석들이 우리가 없는 틈을 타서 안방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랬다. 역시나. 알게 모르게 둘이 번갈아서 안방 욕실을 썼던 것이다. 애들을 너무 과소평가 했구나. 이렇게 되면 결국은 물 절약, 시간 절약이 안 된다는 거다.


할 수 없지. 안방 욕실 샤워기 헤드도 교체해 버리자. 이러면 불평불만도 없고 현실을 받아들이겠지.


문제는 직접 써보니 아주 불편하다는 것. 자식 가진 죄인이라지만 애들 때문에 샤워를 길게 하지 않고 물도 아끼는 우리가 불편함까지 같이 감당하는 건 억울했다.

-여보, 혹시 예전 샤워기 버렸어?

-아니, 왜?

-그거 바꿔 끼우기 힘들어?

-그냥 돌려서 빼고 끼우기만 하면 돼.

-그렇단 말이지.

-왜?

-안방 욕실은 우리가 샤워할 때만 슬쩍 바꿔서 쓰고 다시 끼워놓는 거지.

-아하.


그리하여 아이들 모르게 안방 욕실 구석에 샤워기 헤드를 숨겨놓고 쓴다는 이야기. 평소에는 절수형 샤워기 헤드를 꽂아놓고 씻을 때 빼서 쓰고 다시 바꿔놓는데 이게 뭐라고 은근히 스릴감 있다. 다행히 아직까진 들키지 않고 있어서 욕실 전쟁은 우리 부부의 승리로 일단락된 것으로 자축했다.


물리적 나이는 성인에 들어선 첫째 아이를 정신적으로도 어른스럽게 만들어서 사람 구실 하게 도와야 하고, 고등학생이 되어 기숙사에 들어간 둘째가 3년을 잘 보내도록 계속 신경쓰면서 뒷바라지 할 생각하면 또 보통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의 없이 세상에 내어놓은 이상 책임져야지.


부모인 우리도 아이들 덕분에 끊임없이 경험치를 갱신하고 다양한 노하우를 터득해가며 성숙해진다. 좀 더 지혜로운 부모 역할과 방법을 고민하며 애쓰고 있다. 어쨋든 매일 이렇게 우당탕탕 넷이 함께 계속 자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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