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Burnout) 표현은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는 단어였다. 뭐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야 쌓일 수 있고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면 휴가내고 며칠 좀 쉬면 되지 않나 생각했지만 실제로 겪어본 번아웃은 정말 무기력함이 이렇게나 나를 지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하게 다가왔다.
번아웃은 우리나라말로 하면 소진이라고 하는데 일에 너무 몰두하다가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걸 의미하는데 마치 장작이 활활 타오르다가 불쏘시개를 더 집어넣지 않으면 훅 꺼져버리는 느낌과도 같다. 자세한 증상이나 내용은 아래 글을 참조하면 좋다.
직장인이 퇴사를 꿈꾸는 시기가 각각 3년차, 6년차, 9년차에 온다고 하지만 조금 더 빠른 2년차 중반에 번아웃과 함께 퇴직욕구가 솟구쳤다. 시작은 사수가 나가고, 신규시장을 개척하는 새로운 과제를 맡으면서 정말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매일매일 잠자는 시간빼놓고 고객들을 만나 미팅을 하고, 제품과 서비스를 소개하고 그 와중에 몇군데와는 진행이 잘되서 납품도 시작하여 회사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항상 외근을 하는 내게 "오늘도 사무실에 안오나? 꼭 바로 그쪽으로 가야해?" 라고 부장님이 묻기 시작했다. 당연히 부장님 입장에서는 들어와서 서류업무도 같이 하길 바랐는데, 사실 그 서류업무라는 건 각자 Account를 맡은 영업사원들이 기입해두고 부장님이 취합만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부장님은 대면미팅을 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수정하는 걸 좋아했고, 그 성향을 모르지도 않고 대면미팅도 하면 그만이었지만 당시에는 매일 야근하면서도 성과가 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사소한 부분은 굳이 부르지 말고 각자 처리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해당 업무는 기재해서 공유폴더에 넣어두었고 필요하면 내일 오전에 회사로 출근해서 미팅하고 다시 나가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오늘 꼭 보면 안되냐고 하시더라. 심지어 팀원들도 해당 미팅이 오늘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을 알고 있었고 꼭 오늘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했고, 사실 부장님은 내가 너무 눈앞에 안보이고 너무 관리를 안한다고 느껴 대면미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으니, 성과를 안만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바쁘게 일하는 걸 누구보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팀원을 믿지 못하고 관리할 생각만 했다고 느껴지니 타오르던 열의가 순식간에 없어지는 걸 느꼈다. 그 후로는 한동안 하루에 한두군데 정말 오라고 하는 미팅말고는 내가 스스로 찾아가는 미팅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고, 의욕상실이 너무나도 컸다. 오히려 내가 의기소침해하니까 점심사줄테니 오라는 고객들이 있는데 내부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더군다나 똑같이 응대하면서 시달리는 부장님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니 오만 정이 다 떨어져버렸다. 그래서 바로 이직자리를 알아봤고, 최종합격까지 해서 연봉조정까지 마쳤지만 지역이 달라지는 부분 때문에 최종적으로 이직하지는 않았다. 후에 이직소문을 들은 회사에서 연봉을 인상해주고, 몇가지 대우를 개선해주었지만 번아웃 상태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회사와 팀원에 대한 신뢰를 잃은 부분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처럼 번아웃의 주 원인은 개인에게 있다기 보다,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조직적인 문제나 더 큰 범주의 문제가 일반적이다. 회사입장에서는 최대한 임직원들이 리더십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방법을 찾아야하고, 회사규모가 커질수록 HR의 업무가 중요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임직원들이 번아웃을 경험한다면 회사의 성장속도 및 효율은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말 번아웃이 심하게 왔을 때는 "집에 가버릴까? 내가 일해봤자 회사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업무시간이 지나는 것에 개의치 않고 타이트하게 고객을 방문하던 걸 그만두고, 정시에 퇴근해서 가족들에게 집중하니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원래는 회사생활에 바빠서 매일 야근하고 아이가 잠들어 있을 때 집에들어가곤 했는데, 오히려 회사생활과 성과에 대한 욕심을 조금 내려놓자 더 소중한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가 뭐라고 가족들과 함께 누워 잠들지도 못한 나날들을 보냈나 싶었다.
물론 평소에 자주 관심을 보이는 게 중요하겠지만, 이미 2~3년 동안 돈독한 관계를 만든 고객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루이틀 방문하지 않는다고 큰 일이 생기지도 않고, 하루이틀 더 방문한다고 관계가 더 돈독해지지도 않는다. 적재적소라는 말이 그렇듯 정말 서로 필요할 때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돕는 게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예전처럼 업무시간 이외에 밤늦도록 고객들과 굳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최대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가족과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수록 번아웃은 극복되었지만 예전만큼의 열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만약 내가 가족을 꾸리지 않았더라면 번아웃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생각해면 회사일에 집중하는 대신에 Side Project를 개인적으로 만들어서 진행했을 것 같다. 지금도 Side Project로 주말에 개인적으로 인테리어와 칵테일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데 취미처럼 열정을 쏟을 다른 창구를 만드니까 업무스트레스가 많이 해소가 된다. 사실 개개인마다 어떤 사람들은 회사에서의 성과와 성장이 중요하지만 백이면 백 모든 사람들이 회사에서의 성과를 우선시하진 않는다. 본인에게 우선되는 게 무엇인지 찾고, 회사일에 힘들때면 회사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회사일에 치여 보이지 않았던 소중한 것들과 좋아하는 일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