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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Dec 17. 2020

걷힌 줄 알았던 안개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

우울을 두고 온 곳에 남편을 데려갔다 (3)


*2016.09.29. Thursday.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건지, 아님 충분히 긴장이 풀리지 않았던 건지 새벽에 어났다 다시 잠들어서는 얼마 자지 못하고 금방 눈을 떴다. 한 시간 반쯤 더 으려나. 서울에서처럼 새벽 6시에 기상하니 뭔가 억울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헬스장에 갔다가 출근하곤 하는 버릇이 있긴 했지만 여행을 와서까지 꼭두새벽에 일어날 필요는 없는데. 늘어지고 싶어서 온 여행에서까지 일찍 깨버리니 괜히 아쉬워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다, 내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엄마와 짧게 영상통화를 했다. 휴대폰을 붙잡고 내 연락만 기다리며 불안해하던 엄마는 내 얼굴을 보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울먹이며 전화를 걸어온 엄마에게 어제 구경한 아름다운 광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늘 할 일에 대해 짧게 브리핑했다.


'오늘은 스카이다이빙을 할 거야.'

'할 수 있겠어?'

'해 보는 거지, 뭐.'


나는 번지점프대가 무너질까, 나를 매단 줄이 끊어질까 무서워 번지점프 같은 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모순적이게도 패러글라이딩처럼 땅이 단단한 곳에서 출발하는 액티비티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해내곤 했다. 순히 높이 그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안전에 민감한 건가? 이것도 불안의 한 형태인가. 일관적이지 못한 내가 스카이다이빙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궁금했다.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일을 해치우고 약간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기도 했다. 그게 뭐라고, 별것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해냈어, 하고.


대책 없는 나의 말에 엄마는 '그래, 한 번 해 봐' 하고 대답했다. 웃으며 딸의 도전을 응원하는 척했지만, 나는 다 보았다. 엄마가 튀어나오려는 걱정의 말을 입안으로,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욱여넣어 삼키는 것을.


어렸을 적 나는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차분한 성격으로 어딜 가든 그다지 튀지 않기도 했고, 시키는 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고, 크게 반항을 한다거나 뭘 사달라고 조르는 일도 거의 없었다. 무난한 아이로 잘 자란 나는 다 자라서, 이제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할 20대 후반에 우리 집의 애물단지가 됐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고, 내 우울의 기저를 다져놓았던 엄마에게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내가 휘청이는 동안에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동생들은 투정도 부리지 못하고 나를 달래느라 바빴다. 엄마는 벼랑 끝에 서서 언제 절벽 아래로 떨어질지 모르고 기우뚱거리는 내 몸을 끌어안고 오래오래 울었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자라는 내내 들을 수 없었던 진심을 전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파혼까지 겪어내고 있으니,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은 당연지사였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친척들도 모두 내 안위를 신경 쓰기 바빴다. 괜찮은지,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는지 자꾸만 물었다. 다 자란 줄 알았던 나는 다시 어린애로 돌아가 모두의 걱정거리가 됐다. 미안하고 죄스러웠지만 감정은 조절되지 않고 마음대로 널뛰었다. 친가, 외가를 통틀어 사촌들 중 가장 첫째로서 모범을 보이며 자라온 내가 이제는 온 집안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내 잘못이 분명 있을 텐데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알고 싶었다. 언제까지 내 안의 혼란이 계속될지. 내 속의 미움이 언제쯤 깨끗이 비워질지.


무거운 엄마의 표정을 못 본 체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어지러웠지만 가만히 있으면 우울의 호수 바닥으로 끝없이 침잠하리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나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3분쯤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바츨라프 광장에 위치한 스타벅스가 있어 그곳에 가서 아침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밤새 호텔 방이 약간 서늘하기도 했고, 아침이라 쌀쌀하기도 해서 따듯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부지런히 걸어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고, 따듯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본격적인 프라하 여행 첫날이었던 어제를 돌아봤다. 우울증을 앓고 있든 아니든, 대충 여행하는 스타일은 어디 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어서 이미 가보고 싶다고 지도에 표시해 둔 웬만한 장소에는 다 다녀온 듯싶었다. 여행 막바지에 다시 프라하로 돌아와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갈 곳들을 따로 추려두고 오늘 구경할 곳을 고민했다. 예술에 크게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었지만 여행지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기에 알폰스 무하 박물관에 들러보기로 결정했다.


갈 곳을 정하고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평소엔 존다는 행위 자체에 익숙하지 할 일을 다 마칠 때까지 꾸역꾸역 버텨내는 편인데, 상하게도 신력으로 겨낼 수 없을 정도로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얼른 짐을 챙겨 숙소로 어들어갔다. 몸을 움직였지만 그래도 잠이 전혀 달아나지 않아 한 시간 정도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야 정신이 드는 듯했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졸음이라니. 숙소가 가까웠길래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경안정제를 먹고 있어 자고 일어나도 몽롱한 기분이 얼마쯤 지속되는 것이 당연하긴 했지만, 약효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기엔 약 복용 후로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뒤였다. 한국에서 잠들기 전 먹던 약을 같은 시간에 맞추어 챙겨 먹으려니 체코 현지 시간으로 오후 3시쯤 약을 먹었고, 열두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이 정도로 머리가 무거울 수가 있나. 갑작스럽게 긴장이 됐지만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이야. 처음 온 도시잖아, 어제 긴장을 많이 한 탓이야.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 몇 번이고 되뇌자 갑작스러운 바람에 모래 먼지가 인 것처럼 뒤집어졌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지만, 모래더미 아래 숨죽이고 있던 불안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안 되는데. 오늘은 스카이다이빙을 하기로 했는데. 불안을 잘 조절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시 가방을 챙겨 예정대로 무하 뮤지엄으로 향했다. 뮤지엄 안은 무하의 그림처럼 따스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아르누보 양식의 거장이라 불리는 무하의 그림들은 정교하고 유려했다. 아름다운 곡선과 따듯한 색감을 사용해 마치 성화처럼 여성을 묘사한 그림들에 절로 경건해졌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무하의 그림 사이를 거닐었다. 크지 않은 전시관 한쪽 구석엔 그가 그린 민족주의 작품들이 걸려있었다. 그가 조국이었던 체코로 돌아와 그리기 시작한 역사와 민족에 대한 그림은 부드럽고 화려했던 상업 포스터들과 달리 웅장하고 묵직했다. 민족의 아픔과 상처마저 따스히 안아낸 그의 후반기 작품들에서는 자긍심 느껴졌다.


전시를 다 돌아본 뒤 기념품 가게로 들어섰다. 세계 각지의 박물관, 미술관에서 엽서를 모으는 것이 취미인 내게는 전시 관람만큼이나 중요해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코스였다.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고르다 보니, 어느새 내 손엔 꽤 많은 엽서가 들려 있었다. 매번 여행을 할 때마다 내 주변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친구가 훨씬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힘들고 지치고, 가끔 외로웠지만 그래도 절대적으로 혼자는 아니었다. 내겐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선물을 전해주고 싶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건 내 주변에 내가 챙겨야 할, 그리고 그만큼 나를 챙겨줄 사람이 많다는 뜻이니 부담스럽기보다 기쁜 일이었다. 여러 번의 여행 경험에 따라 선물은 마지막으로 여행하는 도시에서 사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무하 박물관을 찾을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아 거리낌 없이 엽서를 집어 들었다. 내가 간직할 것들과 친구들에게 짧은 편지를 써서 나누어 줄 것들을 고려하여 몇몇 엽서는 두 개씩 구매하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지출을 하게 됐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숙소에 들러 무거워진 가방을 비우고, 한 번 더 길을 나섰다. 오늘의 세 번째 외출이었고, 가장 중요한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카이다이빙. 나는 오랜만에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헬기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 땅을 향해 자유 낙하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걸으니 설렘이 마음 저 아래서부터 꽃처럼 피어나는 것 같았다.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이후로, 우울과 불안 이외의 깊은 감정이 나를 흔드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순간순간 나를 스치고 지나는 기쁨,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은 있었지만 두 잠시였다. 몇 년 동안 내게는 약 기운을 빌어 잠시 무념무상의 상태였다가, 우울했다가, 그 우울로 인해 불안했다가, 불안으로 인해 다시 우울해하며 잠드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내가 붙잡았어야 할 다른 감정들은 쉽게 상처 나지 않게 약이 단단하게 굳혀버린, 그렇지 못한 자리엔 우울과 불안만이 가득한 내 마음에 머무르지 못했다. 3년이 넘도록 너무 많은 것을 흘려보내는 데 익숙해진 나는 꽃처럼 핀 설렘이 퍼뜨리기 시작한 포자가 마음의 땅에 박히고 씨앗이 되는 것이 영 어색했지만, 그 이질적인 감각마저 받아들이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를 짓누르고도 남았을 '픽업 밴을 잘 찾을 수 있을까, 길을 헤매면 어떡하지' 같은 작은 불안들은 한결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을 때도 언젠가 덮쳐올 불안을 걱정하고, 작은 불안도 눈덩이처럼 불어날까 미리 걱정하며 몸을 사렸던 지난날과는 달리 불안이 다른 감정들만큼 별 것 아니게 느껴졌다. 그리고 갑자기 다들 그럴 거야, 누구나 이런 불안쯤은 안고 살아가는 걸 거야, 누구나 가진 불안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 같은 긍정적인 말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억지로 생각하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던 말들이었다. 불안과의 자연스러운 공존. 결코 얻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기이한 안정이 내 마음에 스미기 시작했다. 도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얻은 첫 수확이었다.


픽업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자그마한 밴이 와서 참여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땐 중국인 모자와 스위스 부부가 먼저 셔틀버스에 타서 나머지 참여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사실 스카이다이빙이라는 도전 자체보다 훨씬 무서운 게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동유럽으로 떠나오기 2년 전, 그러니까 역시 우울증을 앓고 있던 시절에 태국에 놀러 갔던 적이 있었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내려 파타야로 가는 길, 그리고 다시 방콕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멀미 때문이 아니라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긴장감 때문이었다. 안전벨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달리는 버스 기사님과 큰 버스 치고는 너무 빠른 속도, 차선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달리는 차들을 보며 지금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 몸은 타국에 있고, 불안 증상을 말해봤자 내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곱씹으며 겨우겨우 견뎌냈다. 도시 간의 이동은 그나마 대형 버스를 이용해서 참아낼 수 있었지만 카니발처럼 작은 밴을 타고 달릴 때는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남이 운전하는 차를 잘만 타고 다녔잖아, 걱정할 것 없어,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아무리 나 자신을 다독여도 소용이 없었다. 방콕에서 반딧불이와 수상 시장을 구경하러 두 시간여를 카니발을 타고 달린 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고,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방콕 도심으로 돌아오는 버스의 표를 끊었다. 몇 번이나 조금 더 큰 버스는 없냐고 물어가면서.


이번 여행은 혼자 떠나오기도 했고,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은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작은 밴을 타고 이동해야 하는 일정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선택지들이 몇 있었다. 스카이다이빙을 하기 위해 타야 하는 셔틀버스도 그중 하나였다. 스카이다이빙 자체보단 오히려 이 셔틀버스를 타는 게 내게 더 큰 도전일지도 몰랐다. 뒤쪽에 앉아있던 스위스 부부가 굳어있는 내게 뭘 그렇게 긴장하냐며, 겁먹지 말라고, 뛰고 나면 기분이 아주 좋아질 거라고 말을 건넸고, 나는 스카이다이빙이 처음이라서 그런지 좀 초조하다고 둘러댔다. 30분 정도랬지.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야. 나는 잠잠해진 줄 알았던 불안이 점점 커지는 걸 느끼며 숨을 골랐다.


십분 여의 기다림 끝에 아르헨티나에서 왔다는 커플이 마지막으로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꼭 매고 셔틀버스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댄 뒤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 날씨가 저렇게 좋았던가? 걸어오는 동안은 많은 생각에 잠겨 바라보지 못하고 있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 같은 구름이 늘어선 하늘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왜 유화를 그렸는지, 왜 구름과 하늘을 그렇게 표현했는지 알 것만 같은 하늘. 진하게 파랗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되뇌었다. 이런 날 스카이다이빙을 한다는 건 행운이야. 난 그 행운을 잡으러 가는 거야.


혹시나 불안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줄곧 하늘만 바라보다 도착한 스카이다이빙 센터는 탁 트인 잔디밭 위에 자그마한 건물이 하나 세워진 귀엽고 소박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았다면 '뭐 이렇게 허허벌판이야?'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만큼 넓게 펼쳐진 잔디가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부스러지는 볕과 잔디밭의 평화로움이 차를 타고 오느라 긴장했던 내 마음을 살살 달래주었다. 주차장에 내려 센터로 걸어가는 동안은 먼저 스카이다이빙 체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저 멀리 커다란 헬기가 몇 대 주기되어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 작은 헬기 한 대가 사람들을 태우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내가 건물 앞에 서서 예약 확인을 기다리는 동안 방금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이 헬기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엄청 금방이네. 몇 분 걸리지도 않겠네. 담담하게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들떴다.


옷 위에 점프슈트를 입고, 안전교육을 받았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고, 고글을 잘 쓰고 같이 뛰는 강사의 말을 잘 듣고 몸을 맡기기만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셈이었다. 긴장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나와 페어가 된 강사에게 몇 번이나 뛰어봤냐, 그럼 하루에 도대체 몇 번이나 뛰는 거냐, 그렇게 많이 뛰어도 뛸 때마다 재밌고 좋냐 하는 질문을 던졌다. 강사는 보통은 하루에 적어도 세 번 이상 뛰니까 몇 번이나 뛰었는지 셀 수가 없다고, 체험하러 온 사람들이랑 같이 뛸 때는 재미가 없고 혼자 뛰어야 더 재미있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쿨한 대답에 조금 웃었더니 강사는 자기만 믿으라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래, 여기 당신 말고 믿을 사람이 어디 또 있겠어. 점점 더 빨리 뛰는 심장을 안고 강사와 함께 차례에 맞춰 헬기에 올랐다.


헬기는 같이 셔틀버스를 타고 온 참여자들 중 중국인 모자를 빼고 다섯 명을 태운 뒤 날아올랐다. 헬기를 타본 건 처음이었는데, 프로펠러 소리가 너무 커서 먼 곳에 있는 강사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대충 아까 한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겠지. 이미 헬기에 탄 것, 이제는 뛰어내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며 조그만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도가 높아지며 싱그러운 잔디밭이 점점 멀어졌는데, 이상하게 오른쪽 시야가 깨끗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뭐지? 이상한 기분에 고글을 살짝 앞으로 밀어 확인해보니 고글 오른쪽 부분에 흠집이 나 있었다. 지면에서 가까운 것들만 볼 때는 잘 몰랐는데, 멀어진 잔디밭을 보려고 하니 그제야 불편함이 느껴졌던 거였다. 혹시 여분의 고글이 있으면 바꿔달라고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것도 같고, 귀찮기도 해서 그냥 뛰어내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도 다 운명이지 뭐. 정 아쉬우면 다음에 다시 와서 한 번 더 뛰면 되지. 빠르게 돌아가는 프로펠러 소리와는 달리 느긋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는데, 순간 상담 선생님과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들이 아시면 엄청 놀라실 것 같았다. 선생님들, 저 비상약 안 먹고 여행하고 있어요, 근데 괜찮아요. 편안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고 심지어 이런 도전까지 하러 왔어요. 대박이죠. 뜬금없지만 그 순간 내가 참 대견했고, 누군가에게 지금 이 순간 얻어낸 평온함에 대해 칭찬받고 싶었다. 내가 정신이 없긴 없나, 긴장을 하긴 했나 봐. 진짜 별 생각을 다 하네. 스스로 웃기다고 생각하는 도중에 헬기가 상승을 멈췄다. 뛰어내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헬기 문이 열리고 우리는 낙하를 준비했다. 나와 페어인 강사가 근처로 다가와 엄지를 들어 보이며 괜찮냐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강사는 내 눈앞에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이며 다시 한번 순서를 알려줬다. 역시 알고 있다는 표시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강사는 내 등 뒤의 안전장치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열린 문 앞에 선 아르헨티나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뒤에 선 강사가 무슨 말인가를 크게 외치자 그가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고, 곧 3, 2, 1 하는 카운트와 함께 그가 헬기 문 밖으로 떨어져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와. 나 지금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거구나. 낙하산이 안 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미쳤다. 한참 전에 해야 했을 생각과 걱정들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동안 아르헨티나 여자도 헬기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녀 역시 팔랑 소리가 날 것처럼 날아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헐,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저걸 하는 거였어. 그녀가 뛰어내리자 헬기 문 근처를 지키고 있던 강사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나는 엉거주춤 걸었는데, 뒤에서 함께 걷는 강사의 몸짓에 순식간에 헬기 문 앞에 도착했다. 이제 내 차례였다.


강사가 헬기 문틀의 양쪽 가장자리를 잡고 나를 앞세워 문 앞에 섰다. 몸은 헬기 안에 있었지만 이미 시야 안엔 파란 하늘뿐이었다. 여기로 뛰어내리는구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문 앞에 선 건지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내 귓가에 대고 강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준비됐어?'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 똑같이 크게 소리쳤다. 'YES!'


카운트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내 몸이 헬기 밖으로 떨어졌다. 처음엔 땅과 가까워지는 속도가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쑤욱, 공기를 가르고 땅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얼마나 높이 올라온 건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한참을 떨어지고야 시야가 넓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헬기가 움직이고 있어 종이가 날아가듯 옆으로 날아간 것처럼 보였던 아르헨티나 커플 역시 내 아래로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몇 초쯤 더 낙하했을까, 어느새 그들의 낙하산이 펼쳐졌고 나는 머지않아 내 자유낙하도 끝날 것임을  수 있었다. 눈을 한 번, 두 번, 끔뻑거리자 등 뒤에 묶여 함께 떨어지고 있던 강사가 낙하산을 펼쳤다. 촤르륵, 공기와 낙하산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곧 하강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제야 발아래 놓인 풍경들이 자세히 보이고, 눈 앞의 고글의 흠집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활공이었다.


체코의 경치는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높고 현대적인 건물이 하나 없이 목가적인 풍경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뛰어내리기 직전 휘몰아쳤던 생각들이 바람에 날아가고, 마음이 깨끗해졌다. 귓가를 스치는 강한 바람 소리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원한 바람을 타고 날며 조금 전 찰나의 곤두박질에 대해 생각했다. 낙하산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별다른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한순간이었다. 그 찰나를 겪기 위해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걷고 버스에 실려 오는 동안, 또 낙하하기 위해 상승하는 동안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다. 순간인데, 너무 짧아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잠깐인데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았을까. 떨어지고 나면 그만일 감정에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우울로 둔해진 내가 너무 많은 감정과 기회를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반대일지도 몰랐다. 내 우울은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다. 스스로 상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었던 것 같아 속상했고, 이제라도 깨달을 수 있어 기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아니라 믿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하면서도 여전히 무한히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의 내가 머지않아 곧 낙하산을 펴고 천천히 바닥을 굽어볼 수 있게 될 거라는, 결국엔 단단한 땅에 두 발을 딛고 서게 될 것이라는 희미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지면이 가까워지자 함께 뛰어내린 강사가 어땠냐고, 막상 뛰니까 별 것 아니지 않냐고 물었다. 뛰어내리는 동안 머릿속에 끼었던 안개가 바람에 날아간 것 같아 개운해진 나는 기분이 좋아져 그와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땅으로 내려왔다. 흠집 난 고글을 벗으니 주변이 더 환하게 보였다. 아름답구나. 탈의실에서 점프슈트를 벗고 나와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똑같아 보이는 주변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다. 불안은 또 오겠지. 하지만 언젠가 사라질 것이니 그가 찾아왔다고 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겠다 결심했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프라하 시내로 돌아오니 4시 정도였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 간단히 씻고, 약을 챙겨 먹은 뒤늦은 낮잠을 취했다. 내일 오후엔 체스키 크룸로프로 향하는 버스를 탈 예정이라 오늘은 꼭 야경을 보러 나가야 했다. 9시에 맞춰놓은 알람에 잠에서 깨어 간단히 채비를 하고 밤 산책에 나섰다. 까를교를 건너 프라하 성에 올랐다가, 다시 구시가지의 골목골목을 걸었다. 한 시간 반 정도의 밤 산책은 더없이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어느 노천카페에 앉아 즐겁게 수다를 떠는 한국 여자들을 지나치며, 나도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왔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마가 함께였다면, 동생들이 함께였다면 또 어땠을까. 자꾸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는 걸 보니 며칠을 홀로 보내며 스스로와는 질리도록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19.10.05. Saturday.

긴 긴 이동을 앞둔 날이었다. 짧은 프라하 여행을 마무리하고 장장 다섯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달려 잘츠부르크에 가야 했다. 오전엔 딱히 정해둔 일정이 없어 최대한 뒹굴거리다 느지막이 일어나고 싶었지만,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땐 남편이 아침 일찍 일어나 이미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시 감기려는 눈만 억지로 뜨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으니 거 참, 기가 막히게 성실하고 부지런한 모습에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여행을 와서도 부산을 떠는구. 한참을 돌아다닌 남편은 이제 며칠간 입은 옷을 다 다시 꺼내 정리하고 진공 팩에 넣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남편은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는 타입이었다. 체력이라면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나였지만 기력으로 따지자면 남편에게 훨씬 뒤처졌다. 내가 게으르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는데, 남편과 살며 처음으로 나보다 더 부지런을 떠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뭔가 눈에 거슬릴 때마다 바로 몸을 일으켜 청소기를 밀고 바닥을 닦으며 요란을 떨곤 하는 타입이었는데, 엄마는 그런 내 행동이 반려인에게 스트레스가 되진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결혼을 해보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집들이를 하던 날, 엄마는 나보다 더 부산을 떨며 쉬지 않고 집안일을 하는 남편을 보고서야  남편 한 번 잘 골랐다며 한시름을 놓았다. 우리는 주말 아침 일어나 두 시간에 걸쳐 집안을 돌보고, 각자의 할 일까지 다 마친 뒤에야 '그럼 이제 아침 먹을까?' 하고 묻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여행 와서까지 저렇게 부지런을 떨다니. 눈만 도르르 굴리며 이불속에 파묻혀 있자니 게으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슬슬 몸을 일으켰다.


덜 깬 잠을 쫓으려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땐 내 화장품과 오늘 입을 옷 정도만 제외하면 대부분의 짐이 깔끔히 정리돼 있었다. 남편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인 뒤 느긋한 마음으로 외출 준비를 하고, 완벽히 짐을 챙겨 캐리어를 세워둔 후에도 체크아웃까지 두 시간 반이 넘도록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시간도 많은데 숙소 근처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보자며 산책에 나섰다. 이른 시간 문을 연 상점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몇 번이고 지나쳤던 거리가 낯익었다. 비가 올 것처럼 흐린 하늘이었지만 거리를 거니는 기분만큼은 훈훈했다. 조금 걷자 배가 고파진 우리는 어느 뜨르들로 가게에 들어가 뜨르들로 두 개와 커피를 주문했다. 남편이 자꾸 안쪽에 초콜릿이 발린 뜨르들로를 먹고 싶다기에 우리 입맛에 너무 달 거라고, 그냥 기본을 먹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굳이 초콜릿이 발린 뜨르들로를 시킨 남편은 결국 초콜릿만큼이나 진한 후회를 맛봤다. 따듯한 커피를 한잔씩 들고 숙소 근처 소품샵도 구경하며 귀여운 핼러윈 소품들에 감탄하고 곧 비를 뿌릴 것 같은 날씨에 대비해 우산을 구입했다. 슬슬 자리를 펴고 있는 하벨 시장도 슬쩍 돌아봤다. 어느 도시에 가든 주말에 열리는 플리마켓이나 재래시장을 구경하는 걸 가장 좋아해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점포가 많지 않았다. 몇 군데 되지 않는 아기자기한 색감의 소품들과 과일을 파는 점포들을 둘러보고 나니 적당히 시간이 흘러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 체크아웃을 한 뒤 캐리어를 끌고 프라하 역으로 향했다. 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잘츠부르크로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다.


프라하 역으로 향하는 트램 안에서, 꼼꼼한 남편은 점심을 먹기 전에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출발하는 승강장을 미리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본 바 잘츠부르크로 향하는 버스가 출발하는 곳이 두 군데인 것 같다며 확실히 알아두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미리 플릭스 버스를 예약하면서 승강장을 대충 확인해 둔 상태였고, 맨 앞자리로 좌석까지 미리 지정해두었기 때문에 나를 좀 믿어주었으면 했지만 앞서 '비행기 좌석 지정 사건'을 겪은 나는 지은 죄가 있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프라하 역에 도착해 물품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승강장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돌아다니며 알아보다 보니 정말 잘츠부르크로 가는 버스는 두 군데서 출발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짐을 맡기고 나니 거세게 내리기 시작한 비를 뚫고 버스표 판매 부스에 가서 한번, 두 승강장을 모두 찾아가 다시 한번 확인을 쳤다.


'미리 안 알아봤으면 짐 들고 헤멜 뻔했지?'

'응, 그러게.'

'꼼꼼한 남편 둬서 나쁠 거 하나 없어.'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에게 박수를 쳐줬다. 점심을 먹기로 한 식당으로 가기 위해 조금 전 소품샵에서 산 우산을 들고 남편과 나란히 걸었다. 역 근처는 관광지 중심인 시내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프라하'라는 도시가 주는 돌길, 아르누보, 야경과 같은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커다란 대로와 갓길을 꽉 채워 주차한 차들, 꽤 신식의 건물들이 나타났다. 이쪽에 와본 건 나도 처음이었으므로 길을 조금 헤매며 식당에 도착했다.


가는 도시마다 적어도 한 번은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는 남편의 말에 따라 프라하 역 근처의 작은 식당을 미리 예약해뒀었다. 인터넷에서 좋은 후기를 발견하고 예약한 식당은 작지만 포근한 분위기였다. 직원들은 비바람에 쫄딱 젖은 채 문을 열고 들어선 우리를 따듯하게 맞아줬다. 자리에 앉아 전채와 메인 디쉬, 디저트가 나오는 간단한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오랜 시간 버스 의자에 앉아 가려면 술기운을 빌어 잠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맥주도 추가했다. 식사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평소에도 음식을 짜게 먹는 나는 체코 요리에 푹 빠졌다.


'오스트리아 가면 감자가 그렇게 맛있대.'

'안 먹어봤어?'

'그땐 요거트랑 방울토마토만 먹었다니까.'

'연비가 되게 좋은 편이었나 보다.'

'그랬나 봐. 헝가리에 가면 음식이 더 맛있대.'

'얼마나 짜길래 여보가 그렇게 맛있다고 할까. 기대된다.'


감탄을 연발하며 요리를 먹어치우고, 드라이아이스로 장식한 멋진 디저트까지 맛있게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지금은 이렇게 먹는 게 좋은데, 그땐 왜 뭘 먹어야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던 걸까. 역시 약 기운을 연료로 살아가고 있던 걸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빗길을 걸어 프라하 역으로 향했다.


편의점에 들러 버스를 타고 가며 먹을 간식과 물을 조금 사고, 맡겨두었던 짐을 챙겨 미리 알아봐 둔 버스 승강장에 도착했다. 이번엔 자리를 제대로 예약해두어 그나마 레그룸이 넓은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남편에게 거봐라, 내가 오빠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아느냐, 세심한 아내를 둬서 나쁠 거 하나 없다고 말하며 생색을 냈다. 잘했다는 남편의 칭찬을 듣고 뿌듯한 기분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체스키 크로프를 경유해 잘츠부르크로 가는 버스였다.


지난 여행에 체스키 크로프에서 아주 안 좋은 밤을 보냈던 기억이 있어 이번 여행에서는 체스키 크로프 대신 할슈타트를 넣었다. 사실 지금부터의 일정은 빈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가보는 곳이라 아주 기대가 됐다. 방금 배불리 먹었으면서도 입이 심심해 젤리 한 봉지를 뜯으니 남편이 연비가 좋았던 사람이 맞느냐며 놀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새콤한 젤리를 먹으며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남편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표정을 보니 아마 회사 일 때문이 아닐까 했다.


당시 우리는 뒤늦게 찾아온 30대의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중이었고, 서른다섯이 가까운 남편은 좋아하는 일을 더 좋은 환경에서 하기 위해서 애쓰는 중이었다.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상사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그는 결국 오랫동안 꿈꿔온 직업을 얻기 위해 몇 번의 도전에 나섰다. 채용을 자주 하지 않는 직업이기도 하고, 운이 따라야 합격을 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해서 쉽지는 않았다. 30대엔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을 줄 알았는데. 쳇바퀴 같은 삶일지라도 열심히 발만 구르면 될 줄 알았는데. 내가 겪어내야 했던 현실 속의 30대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적당한 월급을 받으며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감정적으로는 애정과 열정이 넘치던 20대 때보다 훨씬 허기가 졌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뒤늦게 사회에 뛰어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공을 들여 튼튼히 만든 배를 타고 사회로 나왔지만 거센 풍랑은 그의 배를 제멋대로 몰고 다녔다. 물에 잠기지는 않았는데, 확실히 튼튼하기는 한데, 그런 멋진 배의 키를 놓친 것만 같다고 이야기하는 남편의 표정은 어두웠다.


나도 더 이상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고 싶지 않아서 덩달아 생각이 많아졌다. 삶이 구체적이 되는 순간이 올까. 무엇을 짚어나가야 옳은 것인지 알 수 있는 때가 올까. 보이는 듯해도 잡히지는 않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게 될까. 나이가 들며 많은 경험을 하고 그만큼 현명해지면 나의 길이, 내 곁의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길이 보일까.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저 우리 두 사람이 웃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생활이 넉넉하지 않아도, 변변치 못한 모습이더라도 그 가운데서 서로를 향해 웃을 수만 있다면 그게 행복한 결혼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보며 웃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복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몇 번이고 이직을 권했다. 좋은 직장이지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잖아. 이렇게 계속 참고 다니다간 병이 날 것 같아. 인내의 끝이 달지만은 않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한 말이었지만 남편의 의견은 달랐다. 곁에서 보기만 해도 위태로워 보이는 그는 신중히 길을 살폈다. 아무렇게나 선을 그어나갈 순 없어. 인생은 쉽게 고칠 수 없는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리고 나는 너를 책임져야 해. 그러기로 했어. 하고 말하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를 믿고 나아가야 했다. 짙은 안개 속이었고, 손을 맞잡은 채였다. 버티겠다는 그의 옆에서 나는 묵묵히 지지와 응원을 보냈다. 나 자신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지만 함께라서 괜찮았다. 계속 걷다 보면 여기서 벗어나든, 해가 뜨든 어떤 일인가 벌어진다는 걸 알았다. 남편이 행복에 겨워 춤을 추며 일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진부하지만 가장 진심인 위로를 전했다


버스는 노을을 향해 달리다가 곧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긴 여행을 마치고 잘츠부르크 외곽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사방이 짙은 어둠으로 캄캄했고,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다. 우버가 잘 잡히지 않는 지역이라고 들었기에 지역 버스나 트램을 이용해 숙소로 갈 생각이었는데, 혹시 모른다며 한 번 시도해 본 우버가 금방 잡혔다. 체크인을 하고, 숙소에 짐을 내려둔 뒤 저녁을 먹기 위해 강 건너로 향했다. 강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와 너무 한적하고 안전하다!' 하며 감탄했더니 남편이 아무도 없는 게 뭐가 안전하냐며, 지금까지 안전히 여행하고 있다는 말이 이렇게 사람 없는 길을 혼자 걸어 다닐 때 했던 말이냐고 나를 나무랐다. 아무도 없으니까 안전한 거 아닌가? 나 혼자인데? 이런 강변에 누가 있다고? 대책 없이 말하는 내게 남편은 이렇게 아무도 없으면 무슨 일을 당해도 구해줄 사람이 없다고 맞대응했다.


그러게. 왜 아무도 없는 걸 안전하다고 생각했을까.


오랫동안 나에게 안전은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이었다. 우울과 불안이 심했던 날들엔 나를 지나치는 모든 사람이 나를 해할 것 같았다. 가볍게 스쳐 지나는 사람의 말에도 상처 받기 일쑤였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마주해야 하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내 방 밖으로만 나서도 얼굴을 봐야 하는 가족들과 나누는 대화마저 힘겨웠다. 혼자였으면 했다. 나만 들여다보면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행지에 와서 완벽히 혼자가 되는 것은, 그래서 좋았다. 모르는 언어로 떠드는 이야기들, 기를 쓰고 알아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 했던 일들, 혹시나 저 사람이 인종차별 같은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걸어야 했던 순간들에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가 되는 시간. 늦은 밤 타국의 거리를 거닐며 느꼈던 자유는 상상 이상으로 상쾌했다. 새벽 세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안갯속의 인터라켄 거리를 걸었던 일. 그러다 새벽 어스름을 마주하고, 뜨는 해를 바라보던 순간의 벅참. 새벽 4시, 혼자서 걷고 싶어 남들보다 일찍이 길을 떠났던, 스페인 순례길에서 만난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았던 짙은 안개. 그 속에서 느꼈던 포근함. 그런 날들의 감상은 내게 혼자일 수 있어 안전하고 자유로웠던 기억으로 남아, 아무도 없는 타국의 거리를 걸을 땐 아직까지도 그때를 상기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주말부부로 살고 있는 지금은 월요일 아침, 남편이 근무지로 떠나버리고 나면 진득한 외로움을 맛봤다. 며칠간 함께 지내다 혼자가 된 밤이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켜줄 누군가가 없다는 게 그토록 두려운 일인지 몰랐다. 사람의 마음이란 실로 제멋대로였다.


아무도 없는 게 안전하네 아니네, 티격태격하며 20분 정도를 걸어 도착한 슈니첼 맛집에는 현지인이 꽤 많았다. 현지인이 많다는 건 맛이 보장된다는 뜻 아니겠어? 운 좋게 합석으로 마지막 남은 두 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유창하고 능글맞은 영어를 구사하는 직원에게 슈니첼 이외에 추천할만한 메뉴를 부탁했다. 감자가 들어간 요리면 좋겠다고 했더니 직원은 모든 요리에 감자가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눈을 찡긋거렸다. 직원의 추천대로 내 몫의 이름이 아주 어려운 감자 요리, 남편 몫의 슈니첼,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잠시 뒤 나온 요리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짭조름한 걸 좋아하는 내 입맛에 아주 딱이었다. '나 동유럽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 농담으로 말했더니 남편이 기회가 되면 와서 살지 뭐, 하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빈말 일지 몰라도 하고 싶다는 것에 나쁜 말을 보태지 않는 남편이 고맙고 예뻤다.


맥주 한 잔에 조금 들뜬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오니 방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직원에게 방에 히터가 돌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자 확인해 보겠다며, 오늘은 담요를 몇 장 더 덮고 잘 수 있겠냐는 응답이 돌아왔다. 황당했지만 이것도 추억이 되겠거니 하며 한참을 키득거리다 잠이 들었다.







2016년의 이야기는 여행 중 제가 남겼던 기록을 뒤적이며, 2019년의 이야기는 사진과 기억을 뒤적이며 적어나가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들춰본 2016년의 일기장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더라고요. 좋았다가, 나빴다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사랑받고 싶었다가, 죽고 싶었다가. 그대로 옮기면 글이 될 수 없을 정도였어요. 널뛰는 감정, 그 사이에 어떤 생각을 했었나 곰곰이 생각하며 적다 보니 내가 정말로 힘든 시간을 보냈구나, 싶어요. 그토록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지나 결국은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제가 대견하기도 하고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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