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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May 15. 2024

초등 퇴직교사 분투기

10회: 2024년 5월 15일(수)

<좌충우돌 헤맨 하루, 그러나 마음공부>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고 지혜를 배우는 제자'라는 문장을 기억한다. 현직에 있을 때 최초로 <서울교육연구정보원>의 '서울교육'에 상벌점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첫 문장으로 쓴 기억이 난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스승의 지혜를 배우는 제자'라는 문장으로도 썼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사라진 지 오래다. 매일 같이 보도되는 교사에 대한 악성 민원, 고소, 고발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는 현실은 초등교사 직업만족도가 교사 중 최하위라는 절망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또한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 입시 결과는 역대 최저가 되었다. 직업안정성과 연금 같은 메리트는 더 이상 매력적인 유인책이 아니다. 또한 악성 민원과 수업에 집중할 수 없는 아이들의 불안정성과 과잉 행동은 교사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가르침-배움이라는 인생에서 중요한 과정이 학부모의 악성 민원, 무고, 녹음, 학교폭력, 교권침해라는 각종 장애물에 부딪혀 철저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정년퇴직>을 목표로 교직을 마치고자 했던 나도 결코 명예스럽지 않은 <명예퇴직>으로 마감했다.  

그 후 1년 동안 퇴직 후유증을 겪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가야 할 곳이 없는, 불러주는 곳 없는,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 아주 낯설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누워 끊이지 않는 생각들에 붙잡혀 있었다. 그럴 때는 무기력, 후회, 우울, 자책 등의 감정이 계속 떠올랐다.


2024년 3월 초 서울시교육청 <구인구직> 포털에서 사대부초 도덕 강사 공고문은 퇴직 후유증을 치유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주일에 10시간 강사를 서류 전형과 면접을 본 후 채용한다는 공고 내용도 낯설었지만 이유 없이 <도덕>이라는 과목에 마음이 쏠렸다. 면접 당일 지원해 주셔서 매우 감사하다는 말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용 후 들은 이야기인데 지원자는 단 한 명이었고 바로 나였다.


또한 같은 구인구직 포털에서 체육 수업으로 <탁구 강사>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했고 역시 지원자는 단 한 명이었다. 이어 2023년 12월 교육부는 교사들의 업무 경감 방안으로 <학교폭력 전담조사관> 제도를 만들었고 한 달 동안 고민하다가 지원했다.


도덕 강사, 탁구 강사, 학폭 조사관의 일을 병행하면서 22년 겪었던 트라우마를 조금씩 치유하고 있다. 그중 제일 잘 한 선택은 <도덕 강사>이다. 특히 5학년 <감정조절>에 관한 단원을 준비하고 가르치면서 마음공부를 하는 느낌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수업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수업 연구를 하고 최신 동영상을 수업 전개 과정에 배치하여 재미있으면서 의미 있는 가치를 지향하는 지도안을 매 차시 짜고 있다. 다행히 아이들의 반응도 좋아 도덕 수업이 재미있다고, 의미 있는 배움이라는 피드백을 자주 받았다.

슬로우의 인간 욕구 5단계 중 최상위 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를 경험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감정조절에 대한 내용이 있어 수업 시작 전 <5분 명상>을 한다.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거나 미덕에 관한 시를 말없이 읽기도 한다. 요즘에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교실이 비좁아 역할 놀이를 해야 하거나 넓은 장소가 필요할 때는 <멀티실>을 이용한다. <멀티실>은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가장 좋다. 장소가 넓어 음악 감상에서 중요한 현장감과 공간감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감상용 스피커가 아닌 방송용 앰프 스피커지만  초보 음악 감상자에게는 충분하다.


클래식 음악으로 명상을 대신할 때 정말 행복하다.


그러다 드디어 사달이 났다. 매주 화요일은 집 인근 초등학교에서 3개 반 탁구를 가르친다. 그런데 갑자기 탁구 수업이 취소되었다. 출근 준비를 하던 중 담당교사가 미안해하면서 전화를 했다. 어차피 나갈 준비를 마쳤기에 사대부초에 자발적인(?)출근을 했다. 마침 다음 날 수요일이 <석가탄신일>이라 사대부초에 가서 목, 금 도덕 수업 준비가 불가능했다. 본교 직원도 아닌 시간 강사를 위해 공휴일에 학교를 개방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대부초로 출발했다. 백팩에 노트북과 접이우산, 책 1권과 물품 등을 넣으니 계속 메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전철 상단 짐칸에 올려놓았다. 밖을 쳐다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종로 5가, 종로5가역입니다"라는 멘트에 정신없이 내렸다. 그리고 개찰구를 빠져나가려니 <등>이 허전하면서 백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전철은 출발했고 나는 재빠르게 역무실로 뛰어갔다. 다행히 백팩을 두고 내렸던 전철의 기관사와 비상망을 통해 연락이 되었고 2시간 후에 찾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신용카드를 정지시키고 토스 계좌를 인출하지 못하도록 카드 회사, 은행에 전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는 변호사에게 연락하여 경찰에 신고할지 문의하기도 했다.


내가 가르쳤던 <마음 신호등 3단계>를 이렇게 써먹을지 몰랐다.


카드를 정지시키기 위해 전화를 하면서 차분한 안내 멘트에 떨렸던 마음이 진정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급하니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또박또박하지만 느린 멘트를 듣고 있자니 저절로 차분해졌다. 그러면서 <마음 신호등 3단계>를 계속 떠올렸다.


멈춤(감정 알아차리기, 당황, 자책)-생각(일의 결과)-표현(말과 행동을 어떻게 할지)


백팩 분실 사건은 요즘 지나친 행복감에 젖어(?) 좌충우돌했던 나를 진정시킨 약이 되었다.


또한 알았다.


도덕을 가르치면서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 나였다는 것을...


그래서 도덕 수업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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