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물원

by 남궁인숙

퇴근 후, 대학로로 향하는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서 쌓인 피로가,

저녁 바람과 함께 서서히 풀려나갔다.

목적지는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그리고 오늘, 무대 위에서는

'뮤지컬 다시, 동물원'이 막을 올린다.


공연장 로비 한쪽, ‘오늘의 출연진’

안내판 앞에는 관객들이 모여 있다.

친구 역의 한승윤, 김창기의 정욱진,

유준열의 김이담, 박기영의 박상준,

박경찬의 홍은기, 그리고 용삼의 김성현.

배우들의 사진 위에는 각 인물을 상징하는

작은 동물 실루엣이 귀엽게 새겨져 있다.


배우 박상준의 엄마가 지인이었다.

그 인연을 따라 오늘 이 공연장을 찾았다.

무대 위의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마치 중력처럼, 전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힘처럼

느껴진다.

엄마는 오늘도 '원더우먼'이었다.

우리 모임의 실수로 잘못된 예매를

바로잡기 위해,

공연 시작 전까지 수차례 안내 데스크를

오가고, 관계자와 통화하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을 틈도 없이

분주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단순한 ‘문제 해결’

아니었다.

아들이 무대 위에서 빛날 수 있도록,

그룹이 한 자리에서 그 순간을

지켜볼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길을 트는 사랑이었다.


포스터 속의 배우들 표정 속에는 무대

위에서 펼칠 청춘의 이야기와 음악이

이미 담겨 있었다.

내 자리, 1층 가열은 무대와 멀 리 배치되어

있었지만 오히려 공연을 감상하기에 좋은

자리였다.

배우의 표정은 물론, 기타 줄이 울릴 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수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어둠 속에서 기타 소리가

은은하게 번졌다.

배우의 목소리가 객석을 가르며 흘렀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이등병의 편지>의 첫 소절은 마치

시간 여행의 신호탄이었다.

무대 위에는 군대 간 친구를 배웅하던 시절,

웃음과 눈물이 섞였던 젊은 날의

장면이 살아났다.


세트는 단순했지만 섬세했다.

낡은 소파와 키보드, 드럼, 몇 개의 의자,

그리고 무심히 세워진 기타가 전부였다.

그러나 조명이 바뀔 때마다 공간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했다.

대학 동아리의 방이 되었다가,

골목의 작은 술집이 되었고,

때로는 공연장 백스테이지가 되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가수 김광석'이 있었다.

대학 시절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시작해,

밴드 ‘동물원’에서 대중과 만났던 청년.

그러나 그는 더 가깝게,

더 진심으로 관객을 만나기 위해 소극장

무대로 향했다.



배우들은 단지 그의 노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관객과의 거리’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노래와 대사 사이에는 당시의 시대상과

청춘의 고민이 배어 있었고,

그 감정은 객석으로 파도처럼 번졌다.


공연 중반, 피아노와 기타가 잔잔히 깔리고

'서른 즈음에'가 시작됐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그 순간, 객석은 숨조차 삼갔다.

누군가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누군가는 가사를 따라 읊조렸다.

이 노래는 지나간 청춘의 초상화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었다.


'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울려 퍼졌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노래는 단순히 이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가 놓아야 했던 모든 관계와,

그 속에서 받은 상처를 품어주는 위로였다.

너무 아픈 사랑 이별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살아가는 모든 관계의 이야기.

조명이 서서히 사그라들며 마지막 소절이

잦아들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공연 내내 물리학에서의 '양자(量子)'

그보다 더 작은 '미자(微子)'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였다.

'양자'는 에너지나 물질이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로 존재한다는 개념이고,

전자나 광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며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하지만 실험과 관측을 통해 그 존재의

흔적은 분명히 남는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빛의 알갱이,

양자라 불리는 그것은

손바닥 위에 놓을 수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번 스쳐간 순간,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있었음’을 증명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그와 닮았다.

한마디 말,

짧은 시선,

지나간 손길.

그 순간엔 잡히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도 선명히 남는다.

눈에 보이지 않고, 무게조차 없지만,

그 기억은 나를 바꾸고 길을 만든다.

양자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파동이 되어, 혹은 입자가 되어,

여전히 여기 있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나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로 존재하는 것처럼.


과거의 김광석을 소환시킨 객석은

긴 여운 속에 조명이 서서히 꺼져가지만

객석은 한동안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앙코르 요청이 아니라,

그 시절과 그 노래,

그리고 오늘의 무대에

대한 깊은 감사의 표현이었다.

배우들도 관객들도 한마음으로 환호하며

커튼콜을 끝으로 아쉬움을 남기며

마무리한다.


공연장을 나와 대학로의 골목을 걸었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관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김광석의 말이 떠올랐다.

"노래는… 사람을 만나게 하는 거예요."



그 말을 온전히 느끼면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의 노래는 무대 위 배우와 만나게 했고,

옆자리의 관객과 만나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잊고 있던

90년대의 '나 자신'과 만나게 했다.


다시 걸어보고 싶은 거리,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다시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는 것,

그게 오늘 내가 얻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https://suno.com/s/VUpZ7mCLfHMhB84o



다시, 동물원


작사:콩새작가

작곡:수노


1절

집 떠나온 그날의 나

기타 줄 위로 얹힌 숨결

한 장의 표처럼 얇디얇은

청춘을 건너왔네


카페 모퉁이, 웃음 속에서

우린 서로의 노래를 불렀고

창문 밖 바람이 부를 때면

마음은 먼 곳을 향했네


후렴

다시 걸어보고 싶은 거리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다시 듣고 싶은 그 노래가

내 안에 살아 있네


2절

서른 즈음의 담배 연기

밤하늘 별빛처럼 흩어져

잡으려 손 내밀어도

머물지 않는 시간들


너무 아픈 사랑일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해져

마지막 무대, 꺼져가는 조명

그 안에 우리만 남았네


후렴

다시 걸어보고 싶은 거리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다시 듣고 싶은 그 노래가

내 안에 살아 있네



노래는 사람을 만나게 하고

그 사람은 나를 만나게 해

그리고 오늘, 나는 알았네

이게 나의 무대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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