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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Jul 27. 2019

심야의 알리오올리오

좋은 음식에는 항상 이야기가 따라 다닌다. 기억의 맛이다.

추억을 반추해주는 살뜰한 페이스북이 오늘은 내게 4년 전 오늘을 되돌려 주었다;

길가에 살구가 소복하게 떨어져 있다. 누가 일부러 모아놓은 것처럼. 또 그 시간이 된 것이다. 벌써 몇 년째 매번 처음 보는 양 마주친 샛노란 살구 무더기의 계절. 여의상류 올림픽대로 동쪽 방향. 실은 몇 주나 지난 이야기다. 오늘은 수산시장쪽 오른 차창엔 원추리가 한창이었다. 언제나 계절은 도로 한복판으로 지나간다. 눈 깜빡할 새 사라지는 여의도 구간 개나리와 벚꽃(아니, 살구꽃이었구나!), 반포 한강공원에 도열한 회화나무 음영. 그리고 무슨 세쿼이아 숲처럼 방음벽에 무성한 밀림 담쟁이들의 익사이팅한 컬러 변주. 아침저녁 흐르는 시간을 본다. 지금은 평균시속 20킬로미터. 여름 한복판….


읽다가 알았다. 아, 이건 먹을 것 얘기였구나. 여름은 풍요로운 식물의 계절이지. 식물(植物) 말고도 식물(食物). 그래서 오늘은 산책하다 필연적으로 머위밭을 보았다. 머위는 호두나무 그늘에서 잘 자란다. 이제 초여름, 한창 머위철이 된 것이다. 머위는 내 기억에 맛있는 식재료다. 줄기는 베어서 삶고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뒤 껍질을 벗겨 쓰는데, 들기름 두르고 팬에 볶아내도 좋고 들깨국물 자박하게 국으로 끓여도 그만이다.

머위국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플레이되는 장면이 있다. 논두렁에 둘러앉아 걸쭉한 머위국을 대접에 담아 고봉으로 담긴 흰밥과 함께 훌훌 들이켜던 사람들. 개흙이 말라가는 장딴지에 통통한 거머리를 한두 마리씩 붙이고는 모가 늦었네, 날이 가물었네 시끌시끌하던 그 옛날의 아련한 모내기 풍경. 서걱서걱 씹히던 줄기의 식감. 따뜻하고 고소한 들깨국물 맛이 그리운 풍경과 함께 어우러진다.


아버지가 머위를 조금 보내셨다. 들깨가루를 넣고 무쳤다. 옛날 맛이 났다.

머위 이파리는 조금 일찍 뜯어야 한다. 쓴맛이 강한데 데치거나 밥 위에 찌면 쓴맛이 죽으면서 막된장 하나로도 밥숟갈을 부지런히 놀릴 만큼 향긋하고 쌉쌀한 쌈이 된다. 물론 무쳐도 맛있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머위 꽃봉오리 역시 귀한 식재료였다. 머위는 4월쯤 잎과 줄기가 나오기 전에 통통한 꽃봉오리가 먼저 올라오는데, 찹쌀풀을 얇게 입혀 햇볕에 말린 뒤 튀겨내면 뭐라 표현할 수 없이 고소한 간식이 되었다. 젊었던 둘째이모가 맛 봬 주신 음식이다. 부각을 잘 하던 이모는 들깨꽃으로, 깻잎으로 부각을 만드셨다. 이 부각 먹는 맛에 나는 늙어도 이모랑 살겠다고 울며불며 떼를 썼다고, 나중에 엄마가 두고두고 놀리셨다.


부각으로 말하면 머위꽃, 들깨꽃보다 한 수 위인 녀석이 있다. 가죽나무순이다. 집집마다 담장 곁에 섰던 가죽나무는 참죽나무의 다른 이름인데, 이 나무의 어린 순은 데쳐서 기름에 볶아먹거나 고추장에 무쳐 먹어도 향과 식감이 대단히 훌륭하다. 그래도 역시 부각만한 게 없다. 너무 어리지 않은 순을 따서 찹쌀풀을 발라 빨랫줄에 널어 말린 뒤 튀겨내는데, 풀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여러 번 해야 한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보잘것없고 먹잘것없는 초라한 재료를 공 들여 풍성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가죽나무순은 독특한 향과 맛이 나서 찹쌀풀만으로도 맛있지만 고추장 부각이 단연 으뜸이다. 가죽나무순의 향에 매콤하고 달콤한 고추장맛, 여기에 부각의 고소함까지 어우러지면…. 입에 침이 한 가득 고인다. 할머니 떠나신 이후 나는 가죽나무순 고추장 부각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언젠가 용산의 어느 식당에서 우연히 고추찹쌀부각이 반찬으로 나와 감탄한 적은 있지만. 그만큼 부각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 촌스러운 옛날 음식으로 잊히는가 싶어 아쉽다. 음식이란 맛으로 먹기보다 기억과 스토리로 음미하는 것인데 말이다.


좋은 음식에는 항상 이야기가 따라 다닌다. 기억의 맛이다. 사람 침샘에는 그리운 이야기를 운반하는 통로가 있어, 특정한 음식을 만나면 절로 미각 자극 호르몬을 분비하는 건 아닐지. 가족과 친구, 이웃과 얽힌 맛있고 행복한 이야기. 그런 스토리를 나도 내 아이들에게 만들어주고 싶다.


그래서 요즘, 밤 늦게 학원에서 돌아온 청소년 딸에게 며칠에 한 번은 야식을 기꺼이 서비스한다. 형식은 요청에 의한 것이지만 내용은 지극히 자발적이다. 요즘은 주로 파스타인데, 만들기 쉽다. 굵은 소금 한 꼬집을 넣고 면을 삶는다. 면이 익는 동안 팬에 올리브오일을 듬뿍 두르고 통마늘과 느타리, 양송이버섯을 더해 볶다가 삶은 면을 넣고 잠시 더 볶아 접시에 담아내면 끝이다. 그러면 출출한 아이는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엄지를 척 들어올리며 맛있게 먹어준다. 살이야 좀 찌면 어때. 한창 먹을 나이에. 나는 빈 접시를 치우며 한껏 보람에 차서는 아빠가 되길 너무나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 피곤한 게 어딨어. 그래서 엉성한 파스타 서비스에도 최선을 다한다. 나중에 언젠가 “그때 아빠가 해준 심야의 알리오 올리오가 최고였어.” 맛있게 기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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