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psychiatrist
반복적인 우울감이 찾아온 어느 날 난 중얼거렸다.
"365일은 나에게 너무 길다. 100일만 살고 싶어"
그렇게 나의 우울증 치료기가 시작된다.
(처음엔 경미한 우울증상인 줄 알았으나 조울증진단을 받아 버렸다.)
정신의학과를 찾아가기까지 10+n 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예약을 하고 선생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1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금요일 오전에 상담을 예약한 박효림입니다.
간헐적으로 세상을 등지고 싶은 마음이 제 삶을 장악하는데 항상 이유를 찾았습니다.
이 행성에서의 결과는 늘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니 며칠 전에는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중얼거렸습니다. 물리학자가 되고 싶다. 난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 짧은 뇌 속을 뒤적거립니다. 지금 상황에서 물리학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러다 물리학자가 되기 위한 물리적인 시간을 계산해 봅니다. 아니야 난 물리학자가 될 수 없어 물리학자가 될 시간에 다른 것을 하고 싶다. 그러니 물리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집어치우자. 결론 내립니다. 노동은 우울증 걸린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일을 찾았어요.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면 아무 생각이 안 들고 피곤해서 곯아떨어질 수 있거든요. 사실 온몸이 아픕니다. 전 고통을 즐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달 전에는 하루에 4가지 일을 하며 4시간도 못 자는 생활을 했습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아 정말로 죽을 거 같아 멈추었습니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지 않았습니다. 저에겐 아직 갚지 못한 부채들이 있거든요. 모든 부채를 갚기 전까지 저는 죽을 수 없습니다.
노동을 하면 곯아떨어질 수 있다.
사실 그럴듯한 포장된 말인 것을 눈치채셨겠지요. 우울증에 걸려 집중력이 떨어진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노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책임감에 짓눌리는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A를 넣으면 B가 나오는 단순한 일들의 반복은 어쩌면 저를 부채의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줌과 동시에 살아갈 또 다른 힘을 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저는 지금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불을 켜고 창문을 열고 씻는 것, 스스로를 위해 음식을 조리하는 것, 이젠 그것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을 얼마 전에 겪었을 때 온몸을 다해 거부하려는 마음과 달리 숨소리는 작아지고 움직임은 사라져 가던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처럼 미동 없이 눈을 깜박이고 나오지 않는 소리로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뿐이었던 시간을 가까스로 흘려보내고 있었을 때 결심을 하였습니다. 병원에 가야겠다. 그래서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2
선생님 사실 저는 불안정함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오늘 첫 번째 상담을 하고 선생님은 저에게 약을 처방해 주셨는데 아직 먹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처방했으니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당뇨병초기에는 약을 먹을 것이 아니라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충분히 되돌릴 수 있는데 대형병원과 제약회사에서 이익을 위해 일부러 약에 의존하게 하는 거라는 얘기를 당뇨와 함께 살아가시는 외삼촌에게 들은 적이 있어서 우울증 약도 혹시 그런 범주에 있는 거 아닌가? 괜한 꾀를 부려봅니다. 그럼에도 약을 먹어야 하겠죠?
선생님 오늘 4장짜리 초진 설문조사지에서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어요. 대기실에서부터 눈물을 흘린 저는 진료를 마치고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다가 익숙한 카페에 와서 커피를 한잔 시키고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이 삼주전쯤부터 가방에 넣어둔 용윤선 작가님의 ‘집에 왔습니다’ 책을 펼쳤어요. 그러다가 선생님께 하지 못한 말들을 되내어 봅니다. 선생님은 이미 저와 대화를 하기 전부터 우울증 진단을 내리신 거 같았어요. 요즘 있었던 일들만으로 우울증 진단을 내리셨다는 것에 조금 의아했습니다. 누구나 그 정도의 일들은 살아가며 겪는 거 아닌가요? 제가 유독 나약해서 우울한 거 아닌가요? 설마 내가 우울증일까 그냥 내 성격이 나의 기질이 그런 것은 아닌가...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 우울감과 무기력감 에너지 세로토닌에 대한이야기 선생님께서 저에게 삶의 가치에 대해 물어보셨을 때 전 너무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우울증과 삶의 가치가 무슨 상관이지? 왜 선생님은 뜬금없이 삶의 가치에 대해 물어보시지? 삶의 가치가 있어야 살아갈 의지가 있고 살아갈 의지가 있어야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건가? 꼭 삶의 가치가 있어야만 살아갈 의미가 있는 걸까? 그 짧은 시간에 사실 전 선생님께 반문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저에게 삶의 가치를 논하시는 건가요? 삶의 가치가 있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설마 아니시죠? 삶의 가치조차 없는 저는 살아갈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신 거죠? 선생님 사실 저의 삶의 가치는 저 멀리 우주를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답을 못 드렸습니다. 세상을 구하는 것 선한 기업을 만드는 것이 저의 삶의 가치라고 에둘러 말씀드렸어요. 거짓입니다. 이 대답은 이전의 저를 흉내 낸 대답이에요. 선생님 전 현재 삶의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의 저는 살아내는 것이 저의 삶의 목표예요.
선생님 전 사실 불안정함을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안정감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 같습니다. 어쩌면 안정감을 너무 흠모해서 불안정함을 좋아하는 척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뿌리 깊게 한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겪고 견고하게 서있는 존재를 동경하고 존경하면서도 흩날리듯 여기저기 잠시 짧은 뿌리를 내렸다가 떠도는 영혼을 상상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옵니다. 이런 저는 정상인가요?
#3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진료시간이 되면 생각이 잘 안 나서 진료실을 나오고 나서야 입안 가득 말들이 채워집니다. 2주간 약을 먹고 드디어 MMPI검사를 진행했어요. 양극성장애로 추정된다고 말씀하실 때 선생님 표정이 조금 심각해서 의아했습니다. 우울증이나 조울증이나 같은 병이 아닌가... 선생님의 표정이 심각했던 이유는 자살률 때문이겠지요. 선생님 어제부터 새로 주신 약을 먹었습니다. 오늘 저는 아침에 일어나기 어려웠고 너무 생생한 꿈을 꾸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어요. 음악을 들으며 울고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은 너무 즐거웠어요. 나아진 건 없었지만 스스로 병원을 간 행동이 뿌듯했고 약을 먹는 행동은 너무 대견했기 때문이에요.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려고 노력했고 생활리듬이 맞춰지고 마음 안에 평안이 자리 잡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약봉투는 책상 위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고 방안과 부엌에 쓰레기들은 쌓여가고 있습니다. 집안에 제일 깨끗한 곳은 욕실입니다. 지난주에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슬리퍼도 깨끗이 소독하고 그대로 유지 중이거든요. 첫 진료 때 선생님께서 우울증도 여러 가지가 있다면서 저를 위로하는 말투로 말씀하실 때 너무 감사했습니다. 어쩌면 약의 효과보다 누군가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아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내내 울고 있지만 말입니다. 양극성장애 약은 먹고 싶지 않았어요. 나의 우울이 실은 조증 때문에 동반된다고 하는 나의 본모습인 줄 알았던 밝은 에너지의 모습이 사실은 조증삽화 때문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럼 나의 조울증은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갑니다. 이건 나의 성격이 아니라 사실은 증상이었다는 걸까요? 선생님 저는 미술을 전공했어요. 예술가들은 모두 집착이 강하고 목표지향적이고 예민하며 몰두하고 목표를 해내고 방전되고를 반복하는 성질을 갖는 것이 정상 아닌가요?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예술가가 아님을요. 그럼에도 그런 성질을 갖고 있는 건 문제가 있는 것이 맞는 것이겠지요. 집에서 7분 거리에 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 그곳에 가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마음을 먹은 지는 몇 달이 되어가는데 전화로 상담까지 했는데 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우울증은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첫 진료 때 선생님이 말씀하신 문장이 계속 떠올라서 버스를 탈 때나 길을 걸을 때 되도록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에너지를 아끼려고요. 자살을 생각하냐고 물어보실 때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그런데 드리지 못한 말이 있어요.
어느 때 완벽하게 죽을 수 있는 순간이 나에게 온다면
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4
안녕하세요 선생님
자꾸 눈물이 나고 엄마꿈을 꾸는데 정상인가요?
자기 전에 먹는 약은 약효가 4시간 동안 지속되는 건가요? 잠이든지 4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눈을 뜹니다.
이런 적은 없었어요. 저는 원래 아무 때나 잘 자고 아무 곳에서나 잘 자서 모두 감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약을 먹지 않고 자볼까 하다가도 혹시나 잠들지 못해 내일 컨디션이 나빠질까 생각이 드는 것은 약에 의존하기 시작하는 증상일까요?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것이 30분은 지속되었었는데 이젠 5분 정도 머물다가 사라집니다. 너무 감사해요. 어쩌면 약효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선생님 오늘은 이불빨래를 모두 하고 뙤약볕에 빳빳하게 말려 뽀송하게 잠자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미루고 미루었던 방청소를 마무리하였어요. 틈나는 대로 조금씩 조금씩 하다가 오늘 땀을 뻘뻘 흘리며 마무리를 했답니다. 물론 거실과 부엌은 아직도 엉망진창입니다. 사업실패로 정리한 사무실의 짐들이 거실을 가득 채운 채 정리되지 못하고 수개월째 그대로 있습니다. 참 요가를 시작했습니다. 벌써 5번을 나갔어요. 내일도 오전 요가를 하고 병원에 갈 예정입니다. 일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고 짜증 나지만 견딜만하고 있어요. 조금 억울합니다. 나의 우울함이 조증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그리고 나의 특별함이 더 이상 특별함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선생님 그럼에도 전 또 꿈을 꿉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그런데 마냥 기쁘지는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 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조증이 올라오고 있는 것임을 이제는 아니까요. 그리고 조증이 지나간 후 전 또 우울함에 빠져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선생님 어쩌면 제가 우울증 혹은 조울증을 겪고 있는 것은 꿈을 꾸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 애초에 꿈을 꾸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엄마는 왜 항상 꿈을 크게 갖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외할아버지는 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꿈을 이야기할 때마다 부모님은 왜 칭찬을 하며 응원을 해 주셨을까요. 네 선생님 저는 지금 또 도망가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내가 지금 이런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난 그렇게 길러졌고 그렇게 키워졌다고 그래서 난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선생님 제가 좀 비겁한 걸까요?
#5
선생님 오늘은 3번째 진료를 하고 왔습니다. 사실 3번째인지 4번째 인지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진료 시에 했던 검사지를 요청드렸습니다. 스스로를 좀 더 잘 알아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선생님께서 오늘 조울증의 지배증상은 우울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울증은 우울증에서 기인한다고요. 우울증의 방어기제로 조증이 발현된다고요.
전 너무 충격받았습니다.
그럼 조증의 나는 누구인가요?
어쩌면 이 편지는 살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죽어가는 기록이 되는 걸까요?
어쩌면 모든 지나침은 살려는 발버둥이 아닐까.
우선 1년에 100일만이라도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