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인문학] 땅 속에 봄을 품어야 겨울을 견뎌

글쓰기를 좋아하는 도시여자가 시골에 적응해가며 끄적이는 농부되기 프로젝트

by 작가 박신

겨울을 견디는 힘은, 땅 속에 미리 품어둔 봄에 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대부분의 논을 이모작 한다. 양파 또는 보리가 심어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양파밭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기분 탓일까? 아니, 이제는 분명 양파의 시대다.


겨울의 농부가 된 건, 아빠도 올해로 5년 차. 예전에는 여름보다 더 푹- 잘- 쉬던 계절이 겨울이었는데, 이제는 우리 모두가 양파로 인해 겨울농부가 되어 봄, 가을만큼은 아니지만 여름만큼 바쁜 나날을 보낸다.


양파를 심고 캐는 일은 대부분 수작업이라 우리 가족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외부 인력을 불러 20여 명이 함께 와서 모종을 심고, 때가 되면 캐고, 망에 담아주기까지 한다.


겨울농부는 그래서 심고 캐는 사람이 아니라 자라게 하는 사람이다. 땅이 큰 봄을 품을 수 있도록 키워내는 사람이다. 약을 제때에 주고, 어린 양파를 괴롭히는 잡초를 뿌리째 뽑아 치워 주는 것. 그것이 농부가 할 일이다.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 때에 맞춰 예방접종을 하고, 여린 몸과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 부모와 농부는 참 닮아 있다.


양파를 돌보다 보면 제 구멍을 찾지 못해 비닐 속에 갇혀 돌돌 꼬인 양파 이파리가 있다. 그럴 땐 이파리 근처의 구멍을 넓혀주거나 새로 구멍을 뚫어주어야 한다. 비닐 안에서 잔뜩 꼬여버린 양파를 구해내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제 겹의 자리를 찾지 못했을 때, 자꾸 꼬아 생각하는 건 아닐까. 커가는 중에 의도치 않게 불편하고 복잡하게만 느껴진다면, 지금 있는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구멍이야 안 보이면 뚫어버리면 그만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아빠가 양파 자라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지금부터는 이제 커지는 거야. 어린 양파는 처음엔 겹겹이 크다가, 이 시기가 지나면 더 이상 겹이 생기지 않아. 자신에게 생긴 겹을 두껍게, 단단하게 키워갈 뿐이지.”


나는 생각한다. 난 언제까지 겹겹이 커왔고, 언제부터 단단해지기 시작했을까.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직장을 다니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를 발견하며 겹겹이 살아온 내 인생. 그런데 이제는 주어진 것들 안에서 살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더 깊어질 뿐 새로운 도전은 덜 하고, 내가 잘하는 것을 알기에 무모한 시도보다 결과물에 힘을 쏟는다. 새로운 만남보다는 곁을 지켜준 이들과 더 깊어진다.


그래. 마흔이 다가오는 나는 확실히, 두껍게 크는 중이다. 우리는 양파처럼 살고 있었다. 땅 속에서는 단단히 알맹이를 키우면서도, 밖으로는 그저 초록의 이파리 몇 겹만 드러낼 뿐이다. 나의 알맹이가 얼마나 깊고 단단해지는지 아는 건 나와 땅, 그리고 농부뿐이다.


자기 사랑과 취향, 자기 기준이 단단하다면 어떤 겨울도 견딜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땅 속에 자기만의 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유독 힘들고 지친 겨울이 찾아온다면, 자신 속의 양파에 집중해 나답게 내게 주어진 것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 속에 꽁꽁 숨어 쉬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오면, 양파는 다 컸을 것이고, 밭은 다시 논으로 바뀌며, 농부의 시간은 또다시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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