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림 Jul 31. 2023

당신은 해고입니다.

사랑했던 회사 생활이 권고사직으로 끝나기까지

2019년 9월, 3년 하고도 3개월을 더 다닌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반은 자의였다 변명하듯 말하더라도 나머지 반은 타의였으므로 어쨌든 결론은 권고사직, 변함없었다.


그 회사에서 MD로 아주 즐겁게 일했다. 회사라는 곳이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동료들과 상사도 모두 좋은 사람이었고, 대부분 2~30대의 비슷한 나이라 분위기도 자유롭고 유연했다. MD가 '다 한다'의 약자라는 말처럼 온갖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며 새로운 일들을 경험했다. 해보고 싶었던 상품기획 업무도 하고 그 속에서 성취감도 느끼면서 해마다 성장함을 느꼈다. 눈부신 나날들이었다.


입사 후 반년쯤 지났을 때 우리 팀이 맡고 있는 브랜드 중 하나를 분리하여 자회사를 설립한다며 모회사에 남을지 자회사로 이동할지 팀원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이전 직장에서는 다양한 브랜드를 발굴하고 관리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언젠가 꼭 자체브랜드를 만들어 키워보고 싶었다. 큰 고민 없이 자회사로의 이직을 결정했다. 빠른 선택에 두 번째로 큰 지분을 차지했던 건 바로 나의 상사였다. 당시 내가 속한 마케팅 3팀의 팀장이었던 그녀는 강한 확신과 열정으로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 목표한 것은 어떻게든 이루고야 마는 승부사였다. 우유부단하고 미련 많은 나에게는 없던 기질. 그녀를 존경했고 닮고 싶었다. 그녀가 자회사의 대표가 되어 브랜드를 이끌 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회사를 옮길 이유는 충분했다.


뜻이 맞는 여덟 사람이 새로운 회사에 모였고, 우리는 똘똘 뭉쳐 여행용 캐리어 브랜드를 키워나갔다. 상품 디자인과 색상, 기능과 디테일을 함께 정하고, 샘플이 도착하면 여덟 명이 우르르 나와 신이 나서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캐리어에 이름(제품명)을 붙이고 이름 짓는 걸 좋아해서 내가 이름 붙인 상품이 제법 있었다 ― 온라인 판매를 위한 사진까지 찍고 나면, 이 상품들이 배가 아니라 머리 아파 낳은 아이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 애들이 하나둘 팔려나가 좋은 리뷰가 달리면 내 아이가 칭찬받는 것처럼 대견했다. 대량 납품으로 몇 백 개씩 나가거나 입점하는 숍이 늘면, 바쁘고 신경 쓸 건 많아도 일이 주는 기쁨에 생기가 돌았다.


일도 일이지만 우리는 함께 놀기도 잘 놀았다. 술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 주 2~3일씩 술자리를 갖는 날도 많았고, 워크숍을 가장한 MT도 가서 신나게 놀았다. 업무차 좋은 곳도 많이 갔다. 인피니티 풀이 있는 인천의 5성급 호텔과 부산 바다 위 요트에서 광안대교를 보며 숙박하기도 했다. 요트에 낚싯대가 있어 바다낚시도 즐겼다. 지프 랭글러를 타고 제주 해안 도로를 달렸고, 9박 10일의 중국·홍콩 출장 동안 마카오도 들러 화려한 도시를 여행했다. 소소하게 사무실 화분에 토마토며 딸기를 심어 키우기도 했고, 다들 강아지를 좋아한 덕에 우리 집 강아지와 같이 출근한 날도 많았다. 그들과 정말 재미있게 일했고, 진한 동료애를 나누었으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펼쳤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2019년 시장 상황이 나빠지며 회사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 더 많은 업무를 맡게 되면서 놓치는 일들이 생기곤 했다. 노력한 만큼 매출이 잘 나오지 않아 자주 좌절했고 자신감도 조금씩 떨어졌다. 매주 목요일 회의 시간이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든 건 나만큼이나 대표님도 나에게 실망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대표님이 나를 아끼고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 기대를 충족하고 싶은 마음이 일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피곤 했다. 하지만 매출과 함께 떨어진 자신감에 나는 점점 집중하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졌다. 늪지대를 걷듯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에 출근하고 별다른 성과 없이 퇴근을 반복하던 날들이 이어지며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결심'이란 말처럼 단 번에 마음먹어질 줄 알았는데, 물엿처럼 끈적한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마음은 좀처럼 꿀꺽 넘어가질 않았다. 즐거웠던 추억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고, 열정적으로 일했던 날들이 다시 잘할 수 있을 거라 부추겼다. 하지만 나는 지쳐 있었고, 마음을 되돌려 상황을 역전시킬 힘도 의지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일단 '퇴사'로 마음을 기울이고 나니 출근하는 매일이 현실감 없이, 마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인 듯 까마득한 느낌처럼 다가왔다. 언제 말을 전할까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대표님이 이야기를 좀 하자고 부르셨다. 그날 나는 권고사직을 당했다. 존경했고 동경했던 사람에게 말이다.






사실 ‘권고사직’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솔직히 말해 '권고사직'이란 단어를 마주하면 아직도 약간의 거부감과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회사 생활을 사랑했던 만큼 그 일은 나에게 상처가 되었다. 대표님도 나름대로 마음앓이를 하셨을 거다.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이 고뇌하고, 마음 쓰셨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좋아하던 일과 사람에게 부정당하고 배제된 것 같은 느낌은 정말이지 괴로웠다. 권고사직은 ‘나는 더 이상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증명 같았다. '세상을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자'는 나의 인생 최고의 가치와 완전히 반대에 선 기분. 그래서일까. 퇴사 후 몇 달간 가벼운 우울감을 그림자처럼 달고 지냈다. 웬만한 걱정은 자고 일어나면 털어낼 정도로 낙천적인 내가 처음으로 오랜 기간 마음이 어두웠던 때였다.


어두운 마음과는 반대로 몸은 필사적으로 계속 움직이고자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저 깊이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본능적으로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래서 퇴사 전 산림교육전문가 과정에 등록하고, 회사를 나오자마자 공부를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관심 있고 궁금했던 걸 해보자 마음먹었다. 하고 싶었던 일이라 그런지 공부가 참 재미있었다. 직장인일 때는 하루의 대부분이 회사에 녹아들어 갔는데, 온전히 나를 위해 시간을 쓰니 하루하루가 보람찼다. 우울의 강에 발을 담그고 있던 나는 숲을 공부하며 풀이 있는 들판으로, 나무가 있는 숲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무척 힘들고 우울했지만, 만약 권고사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회사라는 틀에 갇혀 작은 세상만 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정이 많아서, 다른 길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조금만 견디면 나아질 거라 생각하면서 어쩌면 회사에 계속 머물렀을 수도 있다. 타의적으로나마 회사와 나를 연결하는 끈을 끊었기에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줄이 끊긴 연이 바람 타고 멀리 날아가듯 말이다.


지금은 매 순간 나를 위한 선택을 하면서 조금 더 나다운 삶에 다가가고 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힘들었던 일이 오히려 더 좋은 쪽으로 삶을 이끌었다. 아픈 경험이었지만, 그 덕분에 이제는 거칠고 힘든 일이 다가오더라도 새로운 기회와 시작 또한 그 속에 함께 있음을 안다. 어쩌면 기회라는 녀석은 '불편과 고통'이라는 가면을 쓰고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감내하는 자에게만 기회를 열어주려고. 그 속에 기회가 있는 줄도 모른 채 고통을 손에 움켜쥐고 좌절과 자기 비난의 시간을 통과했다. 시간의 끝에 선 나는 조금 자라 있었으므로 아마도 그건 성장통이었을 것이다.

이전 01화 숲해설가를 꿈꾸는 시골 촌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