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를 먹고 자라는 망설임과 두려움
‘숲해설가’라는 직업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았는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회사를 다닐 때니까 아마도 2016년~2018년 사이일 거다. 그때는 그저 ‘와! 숲에서 일하는 직업이라니. 어떤 걸까?’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호기심에 포털 사이트에 ‘숲해설가’를 검색하니 여러 블로그가 나왔었는데, 자격증 취득 방법을 소개하면서 끝에 교육 기관 홍보를 곁들인 글이 대부분이었다. 똑같은 정보를 복제한 영양가 없는 글들. 내가 원하는 건 ‘숲해설가 자격증을 따는 방법’이 아니라 ‘숲해설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들려주는, 현장감 묻은 생생한 목소리였다. 숲해설가로 일하기 위해서는 ‘산림복지 전문가’ 자격증이 필수였지만, 자격증을 따는 것보다 도대체 숲에서 어떤 일을 하는 건지가 궁금했다. 사방이 시멘트로 막힌 네모난 건물이 아니라 숲, 무려 숲에서 일하는 직업이라니!
그때는 듀얼 모니터가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전자파를 햇살처럼 받으며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고 있었기에 신선한 공기와 살갗을 스치는 바람, 새소리 같은 것들에 목말라 있었다. 그러다 알게 된 ‘숲해설가’라는 직업은 마치 사막 위의 신기루와 같았다. 아롱아롱거리는 환영을 좇듯 인터넷 세상 이곳저곳에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있던 숲해설가의 조각들을 주우러 다녔다. 회색빛 사무실이 아닌 초록의 숲에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지친 날들을 위로했다. 그 흥미와 집중은 이내 바쁜 일상 속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지만, 조각을 모으던 시간은 수척해진 마음을 얼마간 살찌워 주었다.
대표님과의 권고사직 면담 후 머릿속이 팽팽 바쁘게 돌아갔다.
‘앞으로 뭘 해야 하지?’
똑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며 매일 같은 풍광을 보는 대관람차 같은 하루,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이 되는 하루 속에서는 꺼내보지 않았던 빛바랜 질문이 둥실 떠올라 머리를 채웠다. 막막함과 기대감이 함께 서려 있는 디 질문을 던지며 오랜만에 미묘한 쾌감을 느꼈다.
‘나 살아있구나!’
그저 앞에 펼쳐진 시간을 통과해 내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지, 무얼 하며 살지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았다.
퇴사를 준비하며 ‘숲해설가’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이번엔 이걸 한번 제대로 알아보자. 해보고 싶었던 걸 하는 거야.’ 자격증이라도 따 놓으면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싶었다. 룰루랄라 희망을 끌어안고 전처럼 포털 사이트에서 숲해설가를 검색하고 여러 정보들을 읽어 내려갔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희망과 설렘은 어느새 현실적인 걱정과 고민에 부딪혔다. 선택의 기로에 선 나의 발목에 끈덕지게 묻어 있던 고민들.
은퇴 후 추천 직업이라고?
선택을 가장 망설이게 했던 부분이다. ‘중장년에 제2의 직업으로 하기 좋은 일’, ‘은퇴 후 노후 준비’, ‘정년 제한 없는 직업’ 등의 수식어가 숲해설가라는 직업에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은퇴 후 건강도 챙기고 돈도 벌 수 있는 좋은 직업이라는 거다. 혼란스러웠다. 은퇴하신 분들만 하실 수 있는 건가? 나에게도 기회가 오는 일인 걸까? 아직 창창한 30대인데, 창창한 나이라서 못하는 일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나이 제한 같은 건 없었지만, 인생을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과 그 속에 녹아 있을 다양한 이야기들이 곧 능력과 직결될 수 있는 직업이기에 불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한 만큼 대우받기 어려운 환경
숲해설가는 직업으로써 자리 잡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 초반에는 자원봉사, 재능기부 형태로 숲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많았고, 활동하는 사람들 ― 대부분 은퇴하신 분들 ― 도 돈보다는 가치와 보람을 위해 기꺼이 일했다.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고, 그에 따라 급여와 처우도 녹록해 보였다. 인턴과 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에만 발을 담가 본 나로서는 비정규직으로 일한다는 것이 마치 튼튼한 갑판 위에 있다가 돛대에 올라 항해해야 하는 것처럼 도전적으로 느껴졌다. 여러모로 숲해설가가 하는 일의 가치에 비해 처우가 평가절하 되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향을 떠날 결심도 필요한 일
숲해설가가 되면 수목원, 식목원, 국유림이나 국립공원* 등에서 일하게 될 텐데, 그런 장소가 과연 내가 사는 서울·경기 지역에 충분히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서울·경기 쪽은 경쟁률이 높아 티오가 없을 수도 있으니 일을 하려면 거주 지역을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생을 고양시 토박이로 살았기에 가족과 친구, 맛집과 정든 고향을 떠나 산다는 게 무척 서글프게 느껴졌다. (아직 숲해설가가 된 것도 아니면서, 심지어 자격증을 따기도 전인데도 이런 생각으로 김칫국을 찐하게 마셨다.)
* 숲해설가는 산림청 인증 전문자격이며 국립공원은 환경부 소관이므로 국립공원에서 일하려면 숲해설가가 아닌 자연환경해설사 자격을 갖춰야 한다. 공부하기 전에는 몰랐기에 국립공원에서 일하는 꿈도 꾸었다.
시작하기 전에는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고민되게 마련이다. 당시에 했던 고민들이 결국엔 틀리거나 실상은 다른 것도 있었지만,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상상이 꼬리를 물며 망설임과 두려움을 키웠다. 하지만 두려움을 만드는 것은 ‘무지’이며 막상 해보면 생각만큼 힘들거나 어렵지 않다는 걸, 그래도 이 세상에 발 붙이고 30년을 살며 얻은 경험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혹여나 젊은 나이가 불리하더라도 젊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충분히 있을 테고, 당장 숲해설가로 일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길이 열리리라 믿었다. 비정규직에 낮은 임금이라지만, 그 말은 또한 어느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과 노력에 따라 더욱 값지게 일할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익숙한 곳을 떠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대한민국 땅덩이 안이고, 이참에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아보는 것도 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고민하고 걱정했지만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숲해설가 공부를 시작하게 될걸 알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숲해설가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선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일단 해보기로 했다.
머리가 걱정하는 일들은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