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을 보고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이하 <시카고 7>)의 감독 에런 소킨은 판타지 장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작가다. 그가 만약 판타지 영화를 찍는다면 크로마키 앞에 배우들을 세워 놓고 대화만 시킬 가능성이 크다. 잘 알려졌듯 각본가로서 소킨은 주제를 시각화하기보다는 대사로 들려주는 것에 능란하다. 그렇기에 비영어권 관객에게 그의 작품에서의 볼 것이란 다름 아닌 자막이다. 대사가 속도는 빠른데 정보는 상당하다. 배우의 얼굴 대신 자막에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 난감함은 그래서 생긴다. 어쩌면 이 난감함을 부러워하는 영어권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 초 단위로 훅훅 넘어가는 소킨의 대사를 듣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그들의 외침이 환청으로 들린다. 우리에게도 자막을 달라!
어쨌거나 방 안에 있습니다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광경 같은 걸 소킨에게 기대하는 사람은 그의 팬이라 하더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방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만 쓸 줄 아는 작가’로 불리는 것을 알고 인정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은 공통으로 자연광이 부족한 실내극이다.
백악관(<웨스트 윙>), 법정(<어 퓨 굿 맨>), IT 회사(<소셜 네트워크>), 구단(<머니볼>), 보도국(<뉴스룸>), 발표회장(<스티브 잡스>), 포커 하우스(<몰리스 게임>) 중 어디에 있든 간에 소킨의 인물들은 일단 일하러 들어가면 일터 밖으로 좀처럼 나오질 않는다. 휴식 시간 없이 각자의 사무실이나 회의실에 삼삼오오 모여 계획을 짜고 사건을 수습하며 대책을 마련하는 그들은 전형적인 비타민D 부족형 워커홀릭이다.
이번에는 방 안에만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소킨은 최신작 <시카고 7>으로 방 탈출을 시도한다. 영화는 베트남 전쟁으로 미군 사상자가 끊이질 않고 마틴 루서 킹이 암살당한 1968년, 민주당 전당 대회가 한창이던 시카고에서 열린 반전 평화 시위가 폭력 사태로 번지자 폭력 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반전 운동가 8인(이들 중 한 명인 보비 실에게 재판 무효가 선고되면서 ‘시카고 7인’이 된다)의 실화를 다룬다.
시위와 재판을 포함한 실화는 연출자에게 필연적으로 광장과 법정이라는 그림이 되어줄 장소 두 곳을 제공한다.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군중 대 1인 구도로 찍은 강렬한 포스터는 그간의 인터뷰에서 비주얼 묘사에 강한 각본가에 대해 부러움을 느낀다던 소킨의 일격처럼 보인다. 포스터로 암시했듯 <시카고 7>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야외 신이 많고 따라서 등장인물이 자연광을 받는 시간도 길다. 소킨의 영화에서 햇빛과 달빛을 생생히 느끼다니 오래 지켜보고 볼 일이다.
시위대가 경찰과 주 방위대 연합과 무력 충돌하는 낮과 밤의 두 야외 신은 자신에겐 액션 신과 다름없었다는 소킨의 소회가 수긍이 갈 만큼 규모가 느껴진다. 그는 작정하고 힘을 준 그림을 초장에 다 보여주는 하수가 아니다. 두 야외 신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과거 시위를 불러들이는 서사 구조에 따라 각각 중반과 후반에 등장하여 영화의 열기를 달구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전자인 언덕 위에서의 대치와 충돌 현장은 FBI 요원을 증인 신문하는 도중에 모습을 드러낸다. 경찰과 주 방위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 가스를 쏘고 그들을 곤봉으로 내리치는 아비규환의 광경은 시위대는 경찰을 공격했고 경찰은 대응했을 뿐이라는 요원의 사무적인 증언과 정적이고 정돈된 법정 분위기와 대조되어 한층 더 섬뜩하고 역동적인 장면이 된다.
후자인 그랜트 공원에서 거리로 이어지는 진압 현장은 7인 중 한 명인 민주사회학생연합(SDS)의 리더 톰 헤이든(에디 레드메인)의 폭력을 선동하는 발언이 녹음기에서 흘러나올 때 펼쳐진다. 밤하늘 아래 헤이든이 서 있는 무대 주변을 가득 메운 인파와 거리 한복판을 막아선 무장한 경찰과 주 방위군의 이미지는 파격적이다. 하늘이 보이고 사람은 많다. 그 때문에 제시된 현장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와 부피감이 생생히 느껴진다. 이는 실내등이 항상 켜져 있고 소수의 아는 얼굴만 오가던 소킨의 방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감각이다.
보고 있다는 실감은 실제 현장을 찍은 컷들이 섬광처럼 지나가면서 또렷해진다. 컷 속에서 경찰이 든 곤봉은 진짜 곤봉이며 시민이 흘리는 피는 진짜 피다. 관객의 과도한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편집 과정에서 전부 흑백 처리했다지만 사실과 맞닥뜨린 관객은 일순간 영화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진다. 관객에게 그러한 기회를 줄곧 대사로 주었던 소킨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그는 묻는다. 이것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 자료 화면인가. 아니면 당신이 오늘 본 뉴스의 한 장면인가.
[chaeyooe_cinema]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The Trial of the Chicago 7
감독 에런 소킨 Aaron Sorkin
야외로 나온 실내극의 귀재. 오스카가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