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래빗>을 보고
올해 미국 아카데미에서 각색상을 받은 <조조 래빗>의 원작 소설 「갇힌 하늘」(2004)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거짓말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며, 그리하여 현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거짓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크리스틴 뢰넨스) 영화 속 열 살 소년의 마음속에도 어떤 거짓말이 현실이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른 채 소년은 오직 한 사람만을 추종하며 특정 민족을 온전한 사람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조 래빗>에서의 ‘갇힌 하늘’이란 좁고 위험한 거짓말 구덩이에 갇힌 소년이 올려다보는 딱 그만큼의 허상이다.
엄마, 아빠, 히틀러, 유대인 소녀 그리고 나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0년대 독일, 조조 베츨러(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아빠가 참전한 뒤 엄마 로지(스칼릿 조핸슨)와 단둘이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명 더 있다. 바로 히틀러(타이키 와이티티)다. ‘최고로 충성스러운 나치 꼬마’이다 보니 급기야 히틀러를 상상으로 만들어 동고동락 중인 것이다.
조조는 히틀러 청소년단 주말 특별 훈련에 기세 좋게 참여하지만 토끼를 죽여보라는 명령을 차마 따르지 못하고, 단원들에게 겁쟁이 토끼 꼬마 이른바 ‘조조 래빗’으로 불리게 된다. 조조의 유명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류탄 훈련에서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한 히틀러 때문에 흥분한 조조는 결국 얼굴과 다리에 영구적인 상처를 입고 그 여파로 훈련은 취소된다. 그리고 집에서 재활하는 동안 조조는 우리 집에 사는 또 한 명, 유대인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를 발견한다.
그럼에도 두 배우는 미소 짓게 하고
<조조 래빗>은 참혹한 시대를 그리지만 천성이 따뜻한 영화다. 경쾌하고 사랑스러운 에너지는 배우들에게서 먼저 감지된다. 이 영화로 데뷔한 조조 역의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시종 총기 가득한 눈빛으로 동네와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데 가는 곳마다 활력의 발자국을 남긴다.
스칼릿 조핸슨은 15분밖에 출연하지 않지만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로 오르기에 충분한 위엄과 위트가 살아있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엘사 가까이에서 드러나는 투사 같은 면모와 코 밑에 재를 묻히고 아들 앞에서 아빠 흉내를 내는 희극인 같은 모습은 이른 퇴장 이후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조조 래빗>에는 와이티티의 히틀러가 있다
무엇보다 이 강력한 에너지의 발원지는 배우와 감독으로 영화 안팎을 오가는 타이키 와이티티다. 데뷔 이래 줄곧 코미디를 메시지 전달의 핵심 툴로 사용해온 이 아티스트가 이번 작품에서 준 코믹 악센트는 대범하게도 히틀러다. 상상 속 히틀러는 그가 각색하며 추가한 캐릭터로 원작엔 없다. 와이티티는 직접 히틀러를 연기했는데 극적인 표정과 쩌렁쩌렁한 목소리, 과장된 몸짓이 핵심이다. 사진과 영상을 통틀어 가만히 차렷 자세를 한 모습을 찾기 힘든 그가 가장 능숙하게 소화하는 연기 방식이기도 하다.
우스꽝스러운 히틀러 캐릭터에서 개그에 대한 과욕이라든지 학살자를 스리슬쩍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창작자의 의도는 읽히지 않는다. 너무나 친근하고 망설임 없이 조조의 눈을 보고 귀에 대고 나치즘을 주입하는 히틀러의 모습에서 그의 악마성은 더 두드러진다. 히틀러가 다름 아닌 아이 옆에 착 달라붙어 있다는 걸 상기할 때마다 그와 조조가 한 프레임에 담긴 모든 장면은 싸늘한 긴장감으로 얼어붙는다.
안 그래도 와이티티는 《가디언》과의 인터뷰(Taika Waititi: ‘You don’t want to be directing kids with a swastika on your arm)에서 청소년 배우들이 있는 촬영 현장에 히틀러로 분장하고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꺼림직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현장에서 가능한 한 콧수염을 떼거나 본인 모자를 쓰는 식으로 완벽한 히틀러 옷차림을 피하고자 애썼다고 한다. 특히 나치 문양이 부착된 재킷은 항상 벗어 그 누구도 문양이 닿는 불상사를 겪지 않도록 주의했다는데 곱씹을수록 팔뚝에 소름이 돋게 하는 코멘트다.
겪어보니 알겠더라
<조조 래빗>은 작은 방안에서 하일 히틀러(나치 경례)로 충성 맹세를 하던 소년이 유대인 소녀와 집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춤추게 되는 이야기다. 엘사의 등장으로 조조는 나치가 건 최면에서 깬다. 조조는 엘사의 머리에 뿔이 달리지 않았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 이제 조조는 유대인이 괴물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걸 안다. 또 조조는 엘사에게 호감이 생긴다. 그리하여 조조는 유대인이 사랑할 수 없는 열등 종족이 아님을 가슴으로 느낀다. 조조가 엘사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붙인 부정문을 하나하나를 고쳐 쓰는 작업이다.
이윽고 실제 전장 경험은 조조가 좁고 위험한 거짓말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계기가 된다. 길에서 소련의 공격을 피해 다니던 조조는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목격한다. 살인과 승리의 쾌감은 찾을 수 없으며 체계적이며 안전한 훈련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공포다.
이 아수라장을 구하러 진짜 히틀러도 상상 속 히틀러도 오지 않는다. 듣게 되는 총통의 소식이란 이미 자살했다는 것뿐이다. 조조는 만난 적도 없는 히틀러가 아닌 자신을 돌봐주던 훈련 교관 클렌젠도프(샘 록웰)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집으로 무사 귀환한 뒤에야 나타난 상상 속 히틀러에게 조조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이것뿐이다. 강력한 펀치 한 방. 히틀러는 창밖으로 날아간다. 엘사와 마주 보고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조조는 이제 다음과 같은 문장을 겪어봐서 안다. 유대인은 사람이다. 전쟁은 건물이 무너지는 것이다. 시체가 길바닥에 즐비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 것이다.
[chaeyooe_cinema]
조조 래빗 JOJO RABBIT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 Taika Waititi
닫히려는 모든 문에 발을 집어넣는 용기.
타인을 가두지 않아야 나도 갇히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