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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시작인 줄 알았는데 똥밭(1)

(안부귀영화) 1.1 - 영화 스태프 일을 하다

by 초별


스물여섯 살이 끝나가던 겨울, 처음으로 영화 현장 일을 시작하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일반적인 한국 타임라인(?)으로 보면 내 시작은 꽤나 늦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보통은 대학 때 영화를 전공하거나, 방학 때 영화 현장 일을 해보거나 하면서 정말 이쪽이 맞는지 탐색하는 경우들이 많고, 졸업반 즈음이 되면 영화를 진짜로 계속할 건지, 아니면 아주 '이성적이고예리하고현명하게' 빨리 이쪽 일에 대한 마음을 접고 뒤도 안 돌아보고 토끼는게 나을지 결정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전혀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저 “드디어! 시작이다!”하는 기쁨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에서도 영화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뭔가 더 멋져 보이는(?) 철학과를 선택했었다. 어려서부터 여러 영화감독 자서전 같은 걸 많이 읽으며 '기술보다는 깊이가 중요하다'는 말을 명언처럼 마음에 새겼던 영향인 것 같다. 별로 깊이 고민도 하지 않고 영화는 내가 무조건 할 거니까 내 영화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줄 다른 걸 공부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무얼 공부하지? 철학? 좀 있어 보이네? 그러던 중 고전 교육을 중요시하는 세인트존스 대학을 알게 되었고, 고전이면 이미 역사 속에 살아남은 책 들이니까 뭐가 됐든 배우겠지! 하는 대책 없이 단순한 마음으로 세인트존스 대학엘 가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이런 공부를 안 했더라면 얼마나 큰일이 났을까 싶다. 이런 공부를 다 하고 영화를 만들어도 왜 때문인지(?) 내 영화는 깊이가 아주 얄팍한데 공부마저 별로 안 했더라면…? 하하하하하.


여하튼 대학 때 영화 전공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었다. 대학 때부터 영화를 전공하는 다른 친구들보다 4년+가 늦어지는 것 아닐까? 그러면 간격을 좁히기 어려울 만큼 뒤처지는 거 아니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서 영화를 전공하기보다는 다른 걸 전공하면서 영화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욕심이 더 컸던 것 같다. 영화는 당연히 내가 할 거니까! 다른 공부 하면서도 재미로 짧게, 폰으로라도 영화를 찍어보고 만들어야지~라는 생각을 했고, 나는 내가 정말로 그렇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편입 준비를 했던 시간까지 합쳐 6년간의 대학 시절 동안 나는 영화, 아니 영화도 아니고 (편집을 조금이라도 한) 동영상 콘텐츠조차, 단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


당시 대학에서 살아남기만도 바빴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 보지만… 그건 핑계고 마음 속 저 깊은 곳에는 사실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뭔가 하나를 만들면 칸 영화제라도 초청될 정도는 만들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한국의 스필버그인데? 하는 콩깍지를 내가 나에게 스스로 씌워 놓으니 엉망인 결과물을 내 눈으로 보는 것이 두렵고 싫었던 것이다. 꿈을 계속 꿈으로만 가지고 있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그렇게 남들은 대학 가서 이것저것 만들어 보고 시행착오하는 동안 나는 영화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오고 나니 정말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필름메이커스라는 (당시 구인구직을 하고 활발하게 영화인들이 글을 올리던) 커뮤니티를 보며 여기저기 지원을 해봤다. 연출팀을 구한다는 공고들이 올라오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상업영화뿐 아니라 저예산 독립영화, 학생 영화들까지 스태프를 활발히 구하고 있어서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이력서를 보냈다.


구구절절 내가 얼마나 영화를 좋아하고 하고 싶었는지, (기술도 뭣도 없으니) 열정만 담은 길고 긴 자기소개 글과 함께. 며칠이 지나면서 매일같이 메일함을 클릭해 답장이 왔나 안 왔나를 확인했지만 아무 데서도 답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떤 기대도 없을만하던 때, 한 군데서 연락이 왔다! 오우 예 이럴 수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어봤는데...


“저희 영화의 연출은 김** 감독님인데 이력서에는 박**감독님이라고 되어 있네요.”


하…

이력서 메일조차 잘못 보내는 바보 같고 덜렁대는 나 같은 사람도 뭔가 일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어이없었으면 답장을 하셨을까 싶으면서 이런 메일이라도 보내준 임 모 조감독님께 너무 죄송하고 감사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계속 이력서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영화라는 게 정말로 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몇 번, 몇 십 번인지 모를 지원 끝에 저예산 장편영화 연출부로 일을 하게 됐다. 드디어! 상암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아침 열 시까지 출근을 하라고 하셔서 나가보면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감독님 어디 계세요? 하고 연락을 하면 곧 가니까 거기 있으라는 답이 돌아오곤 했다. 조금 뒤 조감독님이 나타나셨는데 조감독님의 상태는 항상 똑같았다. 숙취로 고통스러운 상태.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는 프리 프로덕션을 막 시작해서 조감독님이 씬리스트를 만들기 전까지 연출부 입장에선 할 일이 많이 없는 시기다. 그런데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냥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보면 점심시간이 왔고 피디님, 조감독님이랑 다 같이 구내식당에 어슬렁어슬렁 가서 밥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를 사러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커피는 연출 팀원 박모군과 같이 사러 가곤 했는데 내가 출근을 시작하고 며칠 뒤 들어온 동갑 친구였다. 이 친구도 영화 전공이 아니었는데 아는 것이 아주 많았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래서 이 친구와 영화 얘기를 시작으로 온갖 세상 사는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 외에 제작부도 몇 명 더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다들 영화를 처음 해보거나 몇 작품 안 해본 단계의 또래들이 많았다. 저예산 영화라서 경력자를 뽑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을 텐데 돌이켜 보니 이렇게 비슷한 단계의 사람들이 다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어설픈 것도 많았지만 더 열정이 있고 낭만이 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피디님들도 맨날 밥 사주고 술 사주며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시는데 누군가는 그런 조언이 꼰대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물론 우리들 다 같이 호구처럼 열정페이 계약서에 싸인을 쓰긴 했다... 프리를 시작하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피디님이 한 명씩 사무실로 들어오라며 계약서를 내미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적혀 있었는데 피디님은 한참을 여러 이야기를 하셨었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것은너에게아주좋은경험이고원래다이런거다" 는 그런 종류였다.


그렇군요 네! 하면서 사인을 했다. 이 얼마나 좋은가! 하면서.. 밥도 주고 술도 사주고 노트북도 (대여긴 하지만) 주고, 내가 좋아하던 영화 일을 하고 있는데! 돈까지 주네? 하고 나는 그저 좋게만 생각한 (지금 보면) 호구, (그러나 당시에 보면 당연한) 열정 가득 초짜 영화 스탭이었던 것이다. 이제 보니 이때가 영화판에서 열정페이로 일하는 거의 마지막 기차가 출발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아는 거 많은 박 군이 소곤소곤 당시에도 봉준호 감독 스태프들은 전원이 표준근로계약을 한다더라, 이제 상업영화는 표준근로계약이 점점 많아질 거다 등등 여러 소문들을 들려주었었다.


그리고 술 먹을 때 보면 피디님들이나 조감독님이나 과연 영화인도 표준근로계약이 가능한 건지, 그렇게 되면 제작비가 얼마나 비싸지는데, 영화일은 출퇴근 시간이고 뭐고 그때그때 다 달라질 뿐 아니라 프리, 프로덕션, 후반 때마다 일하는 시간도 다 달라지는데 그걸 어떻게 수치화할 거며 등등의 복잡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나도 그러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었다. (놀랍게도 2019년 상업영화 스탭일을 하는데 모두가 표준근로계약뿐 아니라 철저하게 주 52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상업이라서도 있겠지만..)


아, 나는 인물담당 연출부였다. 왜냐면 조감독님이 나중에 내가 이틀인가 일찍 들어왔으니 인물담당을 하고 박 군은 미술소품 담당 연출부를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인물담당이요? 그게 뭐지?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그냥 다 같이 일했다. 정말 그때의 나는 음... 약간 무뇌충이었던 것 같다. 연출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좀 더 열심히 찾아보고, 인물담당은 특히 뭘 해야 하는지 열심히 공부해도 모자랄 판인데 무엇을 하고 있든 드디어 영화 스태프로 일한다는 그 즐거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한심하군..)


물론 나도 열심히 하기 위해 연출부의 할 일 같은 것도 찾아보고 책도 읽어 보고 그랬다. 조감독님한테도 계속 여쭤보고. 너무 질문을 해대서 조감독님이 나중에 "질문하기 전에 니가 좀 찾아봐!!"라고 외치셨는데 또 어떤 때는 이렇게 외치셨다. "뭘 하기 전에 좀 물어보란 말이야!!" 그러면 나는 박 군과 커피 타임을 했다. 박 군이 괜찮은 사람인 것이 험담이 별로 없었다. 그저 노르웨이 연어의 몸속에는 기생충이 살고 있다는 등의 쓸데없지만 재미있는 잡학다식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처음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연출부가 할 일>을 찾아보고 책 읽어 보고 열심히 공부해도,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콸콸콸 한쪽으로 다 빠져나가고, 결국 현장에서 허둥지둥 우왕좌왕, 욕을 지지리 먹으면서, 또 처음이니까 다들 그러려니 봐주기도 하고 그러면 헤헤 웃기도 하는데 왜 웃냐고 웃지 말라고 또 혼나고, 그러면 또 쫄아서 후다닥 허둥지둥 우왕좌왕하고. 그 반복을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촬영은 끝나 있었다.


마지막 촬영 전 날, 집에서 전체 스태프들에게 쪼끄만 카드를 썼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촬영이 끝나기도 했고 첫 영화 스태프 일이었던 만큼 (나 혼자) 애정이 많았던 것 같다. 스태프들 전부와 친했던 것도 아니고, 말을 많이 못 나눠본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생각을 짜내서 짧은 카드를 쓰고 초콜렛과 함께 나눠드렸다.


그때는 내가 일을 잘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모두에게 고맙고 아쉽고 미안하고 그랬던 것 같다. 동시에 나는 다짐했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들을 만나지 말아야지'하고. 내가 훨씬 멋지게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만나야지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비록 객관적 판단은 안 되지만 내가 얼마나 형편없이 일을 했는지 매 순간 느껴왔고 부끄러웠다. 특히 조감독님께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나는 인물담당으로 정말 꽝이었기 때문이다.


연출부 인물담당이라 함은 조감독님 대신 매니저, 배우들과 소통하는 것이 주 역할이다. 매니저들의 스케줄 내놓으라는 압박과 재촉에 굽신굽신 하기도 하고, 아부를 떨기도 하고, 배우들도 챙기고 배우들이 현장에 왔을 때부터 메이크업 받을 때, 현장으로 나갈 때까지 계속 밀착 마크하며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주 역할인데... 나는 배우들이 메이크업을 받고 있으면 멀뚱히 메이크업 룸에 서 있는 게 뭔가 자꾸 일을 안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배우와 친해질 만큼 내가 사교성이 좋고 그런 사람도 아니고, 나는 왜인지 배우들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래서 메이크업이 시작되면 호다닥 현장으로 나와서 일을 했는데 조감독님이 자꾸 "야! 너 왜 현장에 있어!! 배우들 옆에 있으라니까!!" 하고 괴성을 지르곤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인물담당이 인물담당을 제대로 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짓은 내가 매니저들 전화를 회피하곤 했다는 것이다... 하하하하하.... (어색하니 웃어봅니다)


나는 안 그래도 전화를 싫어하는 사람인데(라고 말하면서도 나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다) 매니저들은 전화를 너무나 자주 했다(자주 하는 게 당연한 거다). 스케줄 내놓으라는 전화, 뭐가 변경됐다는 전화, 이것 좀 바꿔달라는 전화 등 온갖 전화를 자꾸 해서 귀찮아 전화를 아예 안 받았더니 조감독님이 또 괴성을 질렀다.


"전화를 왜 안 받아!!!"

그러면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아 자꾸 스케줄 내놓으라고 하길래.. 조감독님 아직 스케줄 안 짜셨잖아요."

조감독님은 한숨을 푹 쉬시며 거의 포기한 듯 말하셨다.

"그래도 받아야지... 그게 니가 할 일이야...."

불쌍한 조감독님..... 고집쟁이 무뇌충 연출부원이라 죄송했습니다...


그렇게 어설픔과 죄송함만 가득한 채

첫 독립 장편영화 연출부 일을 마쳤고

그러고 나니 2016년, 스물일곱 살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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