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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2시퀀스) 배워야만 한다(1)

(안부귀영화) 1.2 - 시작 점을 찍다

by 초별 Apr 01. 2025


2017년이 밝았다.
드디어 영화를 해보겠다고 야심 차게 시작을 해봤는데 그래서 내가 뭘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었다. 아.. 그래도 잡힌 것 하나 있었구나. 바로 광탈.... (하하하- 오늘도 웃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제작지원 공모전도 내보고 그랬지만 다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겨울에 지원해 본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도 매몰차게 떨어지면서 연달아 광탈을 하다 보니 1년은 훌쩍 지나가버렸고 나는 스물여덞 살이 되어 있었다.


스물여덞 살이라... 한국에서 스물여덞이면 사회 초년생의 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하는 그런 사람들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들 취업을 준비하는 나이인 것 같다. 그렇게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는 시기인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그냥 시간을 보내도 되는가? 에 대한 고민은... 다행히도(사실 불행인지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영화를 하겠다며 마음속에 꿈만 꿔 온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도 있을 테고, 내가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지만 아직 철이 안 들었던 이유도 있을 거다. (누가 알았겠는가... 10대 때는 대학생만 돼도 찐어른처럼 생각했는데 스물여덞이라는 어마어마한 나이까지 내가 철이 안 들 줄!) 그런데 사실 내가 철이 안 들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과 언니들의 끝없는 지지와 격려 덕분이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함께 글을 쓰는 네이버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 나는 예전부터 내 일상의 도전(?)들이나 삶의 진행 상황을 일기로 써서 올리고 가족들과 공유하곤 했다. 어딜 지원하면 지원한다. 떨어지면 떨어졌다... 는 것들을 다 솔직하게 공개했다. 우리 가족이 화목해서도 있지만 언니들은 나처럼 이렇게까지 모든 걸 공유하지는 않는다. 그런 걸 보면 이건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나의 특이한(?) 수다쟁이 성향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했고 글로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걸 좋아했다. 말보다는 글이 더 속 시원하게 느껴졌고 내 모든 생각을 200% 담아낼 수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 때도 내가 어떤 공부를 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것이 힘든지 등등을 다 글로 써왔고 그걸 가족들이 항상 읽으며 '(글로 구구절절 다 말해버리니) 말 안 해도 낱낱이 아는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영화를 시작한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2016년 3월에 쓴 일기가 있는데 당시 가족들을 모아놓고 조그만 모니터 화면을 보여주며 영화 일 계획 발표시간을 가졌다고 기록이 돼 있다. (그때 내가 만든 ppt 자료를 찾아보니 너무 웃기고 기가 차서 피피티 자료 몇 장을 첨부한다) 표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저 글자 겹쳐진건 머선일? 캬컄은... 또 무엇....?


이렇게 시작하는 걸 보니 내용이 어떨지는 정말 안 봐도 비디오다. 아마도 이건 계획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계획이라서, 글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 스스로가 알고 저렇게 겹쳐진 것일 수도 있다. 아래는 돈에 관한 계회.... 이 아닌... 메모다.


으캬컄....? 한 대 맞을까 과거의 나야...?


세계를 무대로..... 세계인을 공감시킬 수 있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밑줄 부분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너무 중요해서 그런지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 피피티를 가지고 발표를 하고 나서 가족들 표정을 본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아주 뿌듯해하며 끝마쳤는데 다들 낯빛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한참을 침묵 속에서 다들 어떻게 입을 떼야할지 모르다가 마침내 쌍둥이가 한 마디 했다. "이걸 보고 나니 더 심란하다 야."


그러나 나는 꿋꿋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가족들의 마음이 바다 같은 거겠지) 그 후로도 계속 가족 카페에 내 일상의 과정들을 공유했다. "이번에 저는 이 공모전에 지원해 볼 거예요!" 하는 글 뒤에 며칠 뒤면 "흑흑 떨어졌다. 나 왜 떨어졌지?"를 고뇌하는 글들이 반복되는 한 해를 보낸 것이다.


그럴 때면 가족들은 저마다 성격대로 댓글을 달아주었다. 일단 아빠는 아빠 특유의 유머라던가 어디서 주워 온(?) 적절한 명언을 댓글로 달아주셨다. 가령, "성공하는 방법은 딱 하나!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앤드류 카네기." 같은 뭐 그런 것들이었다. 감사할 때도 많았지만 어떤 때는 너무 쌩둥 맞은 명언을 가져오셔서 으잉? 왜 이런 명언을? 하기도 했다. 감수성 풍부한 엄마는 챗gpt급으로 공감하며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해 주셨고, 큰 언니는 맨날 "막냉이 오구오구" (난 언제까지 막냉이?), 쌍둥이는 "얌마 열심히 좀 해" 같은 각자 성격에 맞는 응원들을 해줬다.


어떻게 가족들이 이럴 수 있지? 궁금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다. 내 주변 동기들도 대부분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우리 가족의 화목함과 과한(?) 따스함을 알고 나면 무슨 드라마, 영화 속에만 있는 (그래서 그런 영화를 보면 '뭐야, 저런 가족이 어딨어' 할 정도의) 그런 가족상인 것 같다고 얘기하곤 했다. 내가 잘나서 이런 가족을 얻은 게 아니라 그저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

..

라고 겸손을 한 번 떨어주고.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모든 응원과 격려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수십 년(까진 오바지만)에 걸쳐 우리 가족들을 가스라이팅 해왔고, 그것이 대성공을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13살에 센과 치히로를 본 이후부터 가족들에게 쉴 새 없이 수십 번, 수백 번, 수천만 번 떠벌리고 다녔다.


  
나는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이 될 거다!!!


계속 떠벌리니까 처음에는 (내가 어리기 때문에) '그래~! 뭐든 다 해~ 열심히 해!' 하셨던 부모님도 '얘가 진짜 영화가 하고 싶은가?'로 생각이 바뀌시고, 그러다가 '설마, 이젠 꿈이 바뀌겠지' 하고 있다가 '헐 아직도 안 바뀌네'로, 그러다가 나중에는 '와 진짠가보다'로 생각의 흐름이 변해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의 다짐만 떠벌리는 게 아니라 온갖 감언이설도 함께 해가며 부모님이 헤어 나오실 수 없는 정교한 가스라이팅을 했다. "칸에 가면 레드 카펫을 같이 밟게 해 드릴게요"부터 "영화가 대박 나면 저랑 같이 세계 영화제를 돌아다니며 세계 여행을 합시다" 라든가, "돈을 많이 벌면 할리우드에 집 하나, 파리에 집 하나 사놓고 멋진 차도 사드릴게요"라는 그런 이야기들을 (아주 미친 것 같지만)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해댄 것이다.


이런 가스라이팅을 할 때의 꿀팁은 정말로 나 스스로가 믿으면서 가족들에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밑밥을 수년간 깔아왔으니, 이제 와서 "니가 나이가 몇인데, 이제 취업도 해야 하는데 무슨 영화를 한다고" 같은 말은 우리 집에서는 거의 금기어 같은 수준이 돼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한 가스라이팅의 성공이란 말인가.


가족 얘기가 나와서 갑자기 샛길로 샜지만... 앞으로도 가족 얘기는 자주 등장할 테니 이제 넘어가 보겠다.


여튼 그래서 내가 올해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은 한겨레 영화학교에 등록하는 것이었다. 작년에는 짧은 영화 제작 프로그램 같은 것을 해보려다가 말았었는데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나자 올해는 일단 시작 점이라도 찍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알아보던 중 그래도 한겨레 영화학교가 괜찮아 보여서 시작을 하게 됐다. 한국영화아카데미 가려고 알바로 모아 놓았던 (당시 입학금) 200만 원을 고스란히 한겨레 영화학교에 학비로 내게 됐다. 흑... 돈은 또 모아야지... (나에겐 너무나 큰돈이었음)


그렇게 영화학교에 등록하면서, 그리고 첫 수업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감독님(선생님)을 만나면서 내가 든 가장 강렬한 감정은... <분함>이었다. 당시 일기에 또 이렇게 써 놨었다. '분함'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표현이 다 되지 않는다고. 당시의 나는 '사람들 복잡 복잡한 길거리 한복판에 누워 하늘을 향해 이불킥을 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왜 이런 느낌이 들었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오롯이 나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괴리감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단편영화 한 편 멋지게 호로록 찍고 칸에 가서 천재가 나타났다!! 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흐뭇해하며 한국으로 돌아와 상업영화를 뽝! 찍을 수 있을 그런 사람인데(그래? 정말?) 정작 현실의 나는 단편도 하나 스스로 못 찍어서 결국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지원하더니 보기 좋게 떨어지고, 한겨레 영화학교에 등록한 학생이라고...?


이 사실 자체를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분했다(한겨레 영화학교는 아주 훌륭한 곳입니다. 이곳에 대한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려드립니다). 이 분함에 대한 일기에 아빠는 또 어디서 가져온 (아주 좋은) 글을 댓글로 달아 놓으셨다.

자신의 무능이나 처지에 대하여 분노하지 마십시오.
분노는 자각이 아니라 혼돈의 일종입니다.
자기를 향해 분노하지 말고
오직 분발하십시오.
분노는 에너지를 낭비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분노하거나
불평 속에서 살아간다면
끝까지 지지하고 도와줄 수 있는
동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목표를 향하여
오직 분발하십시오.
묵묵히.

-다시 묵상함 <이주연>

아우.... (감사하지만 너무 맞말이라) 얄미운 아빠.... 뭐 어쩔 수 있나. 저기서 말하듯 분발해야지 뭐. 묵묵히!


수업에 간 첫날은 잔뜩 긴장하고 열정을 불사르며 수업을 들었다. 오랜만에 학생이 된 것 같아 즐겁기도 했는데 여기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정말 200% 내 것으로 만들리라 하는 욕심이 어마어마했다. 나는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과 사교를 하거나 어울리는 것조차 안 했다. 뭔가... 그건 나에게 사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친구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배우러 왔고, 빨리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내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동안 공모전을 지원할 때도 이게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뭐 하나 어디 물어볼 곳도, 사람도 없어 너무 답답했었는데 영화에 대한 모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 있는 선생님이 계시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 기뻤다. 빨리 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그 과정에서 궁금한 모든 것을 다 여쭤봐야지!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렇게 시작 점을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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