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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망한 것 같으면  부모님을 탓하라

(안부귀영화)-프롤로그

by 초별 Mar 11. 2025



한가로운 평일 오전이다.

집 뒤 근린공원에는 꼬마 아가들을 태우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이 놀이터나 꽃밭을 돌아다니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나와 비슷한 또래 같거나 나보다 어려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벤치에 올려놓으며, 콩이가 좋아하는 공을 가방에서 꺼냈다. 흥분한 콩이는 뒷걸음질을 치며 얼른 공놀이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휙- 멀리 공을 던져주고 벤치에 앉는다.놀고 있는 아가와 엄마들, 공을 쫓다가 애꿎은 잡초를 이빨로 뽑아대는 콩이를 보며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강아지를 돌보며 오전부터 공원에 온 노처녀 정도일까? 흠… 갑자기 현타가 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것일까?

거슬러 올라가 본다.

한국 영화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영화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니 그때부터였을까? 아니 교수님들이 왜 나를 뽑아줬지? 아, 근데 아니다. 그보다 전에 대학 졸업 후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다가 영화의 길을 선택했던 순간도 있네? 흠… 그렇게 치면… 모든 시작은 내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뿅 가서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했던 13살 때인지도. 젠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님 때문이구나.


어? 근데 그때 내가 뿅 갔던 건 생각해 보니 엄마 아빠가 맨날 우리 자매들을 극장에 데려가셨기 때문인데! 결국 이해도 못할 영화를 어렸을 때부터 봐왔기 때문이잖아! 엄마아뽴!!!!!!! 이게 다 엄마 아빠 때문이야!!!!!


영화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자막이 세로로 있을 때로 거슬러 간다.

음…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나는 이제 꽤나 어른이 된 게 맞긴 한가 보다. 여하튼 2000년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세로 자막이 너무 빨리 사라져서 읽는데 초조함을 느끼며 내내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다. 제주도에 살던 2000년도에 <춘향뎐>을 극장에서 보고 나오던 기억도 난다. 이몽룡이 춘향을 만나 첫날밤을 보내며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하는 야한(?) 장면을 큰 화면으로 보고 있는데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엄청 놀랐었다.

‘너무 야해! 그런데 이걸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고 있다니!’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아빠가 지금은 없어진 낙원상가 쪽의 예술 극장에 데려가셨던 기억도 난다.

뭔가 낡고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는 커다란 극장에서 커다란 손이 나오고 이상한 당나귀 인형을 타고 가짜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몽환적인 화면에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영화를 졸다 깨다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공부하는데 아빠는 여기 자주 와서 영화 보셨나? 나쁜 아빠… 혼자만 재밌는 영화 보고… 근데 이게 뭔 내용이야… 음냐.. 쿨쿨’

그 영화는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이었다. 그렇게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모님이 나를 극장에 데리고 다니셨으니 내가 지금 영화를 하는 것이 부모님 때문 아니고 무엇 때문이랴.


이 모든 게 다 부모님 때문인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다.

영화관에 데리고 다닌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 또 떠올랐다. 부모님이 본격적으로다가 자식의 취미활동(?)까지 영화 관련으로 인도하셨던 것이 그것이다. 중학교 1학년, 방학 때면 친구들은 학원에서 선행 학습을 위한 방학 특강 같은 걸 듣곤 했는데 우리 자매는 애니메이션 센터나 청소년 영상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하는

애니메이션 만들기, 만화 그리기, 영화 부트 캠프 같은 걸 다니곤 했다.


부모님은 우리가 좋아해서 그런 것들을 알아보고 시켰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것들을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는지 의문이다. 아니 생각해 보라. 부모님이 “방학 때 너 애니메이션 만들래 아니면 영어 학원 갈래?” 하고 선택권을 주면 어떤 자식이 영어 학원을 택하겠는가?


과거를 되짚어 보다 보니 또 떠오른 게 있다.

아빠는 우리 자매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비디오카메라를 찍으셨다. 당시 벽돌만 한 카메라를 들고 아빠는 무슨 학교 행사, 가족 행사가 있든 어디를 놀러 가든 카메라를 찍으셨다. 그 결과 우리 자매는 아빠가 촬영하는 카메라 앞에서 리포터 역할을 해야 했고, 세계여행 때는 각자 16mm 카메라를 하나씩 들고 세계 곳곳을 촬영하는 중학생 다큐멘터리 촬영 기사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정리를 해보니 우리 자매는 누구보다 빠른 영상분야 조기교육을 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재교육 뺨치는 영상 교육을 했는데 커서 영화감독이 안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아니, 아니다.

아무리 조기교육을 해도 영화감독이 되지 못하는 일이 영화판에서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하니 혼자 또는 친구들과 만들어볼 수는 있어도 진짜 극장에 걸리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로또에 당첨될 정도의 행운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으니 무모하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라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하하 하고 웃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꿈이었으니 귀엽게 봐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건 귀엽지도 않고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정말 나는 진지하게 그 무서운 착각을 하고 있었고

내가 나에게 스스로 씌워놓은 그 콩깍지를 벗는데 10년이 걸렸다.

10년…

10년은 근린공원의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스스로 사고할 줄 알고 이젠 다 컸다고 착각도 하는 청소년이 될 정도의 꽤나 긴 기간이다. 그 시간을 나는 영화라는 걸 해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것이다. 그리고 눈 떠보니 스필버그가 아니라 근린공원에서 멍 때리는 아줌마가 되어 있다. 누가 말했더라... 되돌아보니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고... 아.......... 내 인생은 망한 것 같다.


이렇게 갑자기 좌절스럽고 슬퍼질 때는 내 주특기를 발휘해야 한다.  부모님 탓하기. 부모님을 탓하면 인생이 조금 쉬워지는 것 같다. 엄마 아빠도 날 사랑한다면, 내가 탓하도록 놔두시겠지 뭐.

부모님 때문이다.

그래, 이 모든 건 다 부모님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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