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necting the dots
토론토 다운타운 중심부에 '철학자들의 산책로(Philosopher's walk)'라는 짧은 산책길이 있다.
추운 겨울이 아니라면 초록이 우거진 나무 사이를 조용하고 한적하게 걸어 다니기 좋은 곳이다. 당연히 트립어드바이저와 같은 여행 웹사이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언뜻 봐도 동네 주민들이 가볍게 걸을만한 평범하고 짧은 산책로일 뿐이다. 토론토 대학교의 세인트 조지 캠퍼스 사이에 난 길이라, 양쪽으로 멋진 건물이 서있고 사색하기 좋은 단단한 벤치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다. 주변의 대학교 건물이 시끌벅적한 도시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는 기능을 하는데, 이곳에 들어오기만 하면 대도시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다.
사랑스럽게 관리된 정원 사이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청설모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모습만 보일뿐이다. 나무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은 차분함 속에 자기만의 시간을 음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이곳 참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친구들과 자주 도시락을 까먹었다. 여름이 한창인 7월에, 우리는 항상 뜨거운 태양을 피해 이 초록색 안전지대에서 점심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원 시절 때에나 할법한 귀여운 경험을 성인이 된 지 한참 후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대부분의 경험이 귀납법을 통해 '감사'라는 결론으로 유도되는 경향이 있다.(요즘은 그런 경향을 많이 고치고 있긴 하지만) 그 시간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건 우리의 도시락을 탐내던 몇 마리의 다람쥐들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뛰는 건 잘 못하지만 걷는 건 정말 좋아한다. 걷기는 내가 매일 하는 일중 하나이며, 이제는 하나의 패턴이 되어 습관으로 형성된 지 꽤 오래되었다.
예전 회사에서 즐거운 일이 없을 때,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소중한 점심시간을 걷는 데에 사용했다. 공식적으로 쉴 수 있는 1시간 외에 앞뒤로 용서되는 10분 정도를 합치면 대략 점심에 한 시간 반의 산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회사로 통근을 했으므로 얼추 매일 세 시간을 걸었을 것이다. 앉아있는 시간이 많은 직장인치고 그때 꽤 많은 시간을 걷는데 할애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귀중한 점심시간에 걷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로움을 안겨주었다. 팀내 중요한 일이 없으면 여지없이 나갔는데, 아마도 든든히 배를 채우는 일보다 걸으면서 마음과 머릿속을 비워내는 게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 행복감에 절여진 산책의 목적지는 대부분 도보로 30분 정도 걸리는 작은 카페였다. 거의 뜨거운 아메리카노, 수요일이나 목요일 정도에는 라테를 사들고 다시 사무실로 걸어오는 것이 나만의 작은 원칙이었다. 한파가 몰아친 추운 겨울에도 점심시간 걷기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 당시 동료들은 나를 한파에도 끄떡없는 강철인간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겨울마다 수족냉증에 시달려 두 개의 수면양말도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어쨌든 그 작은 카페에 가는 길에 ‘철학자들의 산책로'와 같은 짧은 숲 속 길이 있었다. 30분 거리 중에 3~4분 남짓이나 될까. 울창한 나무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나있는데, 바로 앞의 4차선 도로에는 매연을 풍기며 옆동네 강남으로 가는 차들이 쌩쌩 지나다닌다. 아스팔트로 끝없이 이어진 도시 한가운데에 왜 뜬급없이 숲 같은 것이 있지? 하다가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던 기억이 난다. 여긴 원래 숲이었겠지.
그 짧은 산책로는 내가 계절의 변화에 무심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독려해 주는 장치와도 같았다. 이맘때쯤은 나뭇가지들이 움트려고 하는 새싹을 숨기고 있는데, 그건 황량하기보다는 다음 주를 기대하게 하는 모습이다. 그러다 온갖 종류의 초록이 서서히 나무를 뒤덮고 아름다운 벚꽃 나무에서는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가끔가다 보이는 겹벚꽃에 잠시 멈춰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훨훨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쫓다 보면 어느새 자연 속에서 가장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들의 잔치가 열리는데, 역시 매료되기 마련이다. 노르스름하고 붉은 잎들이 오솔길을 가득 채우다가, 어느새 이맘때쯤 봤던 나뭇가지엔 너무나 순수하고 맑은 눈이 쌓여있었다.
갑자기 Connecting the dots라고 하는 스티브 잡스가 남긴 그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만의 귀납법에 의하면 이번 여행에서 6년 만에 다시 찾은 철학자들의 산책로 덕분에 나에게 걷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걷는다는 작은 습관이 나를 어떤 방식으로 끌어주었는지. 글을 쓰면서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또 다른 형태의 내적 성장일 수도 있겠다.
언제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없고, 심지어 의미가 없어 보이기까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경험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왔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하나의 크고 멋진 그림으로 만들지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혹시 읽어주셨다면, 이 글에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가오는 꽃쌤추위를 잘 버티고 따뜻한 봄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