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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나그네 윤순학 Oct 17. 2021

도시는 온통 200자 원고지.


도시 골목은 힐링을 주는 원고지.     


도시는 늘 바쁘다. 오가는 사람도 많고 차들도 많다. 늘 분주히 움직이며 저마다의 길을 간다. 마치 화난 것처럼 웃음기 없는 냉담하고 시무룩한 도시인의 얼굴은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그래도 도시가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 모습을 못 보고 그 정감을 못 느끼고 지나칠 뿐.    

 

나는 신기한 문구, 독특한 카피에 항상 눈이 가는 습관이 있다. 직업은 못 속인다고 평소 길을 걷거나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 사람보다는 다양한 글과 그림에 먼저 눈길이 가는 습관이 있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평범하든 특이하든 다양한 글귀를 읽고 간판, 광고 포스터, 지하철 안내판, 공사판 가림막 광고, 심지어 정당에서 걸어놓은 정치 현수막까지 짧은 찰나지만 일일이 스치며 감상하곤 한다.  

    

하루 일상생활에서 보는 이미지들을 기록한다면 그 자체가 일기가 될 것이다. 거리, 골목에서 마주한 수많은 문구, 글귀들은 제각기 따로따로지만 이 시대의 자화상이고  도시민의 삶을 투영하는 커다란 거울이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대에는 빈 점포, 빈 상가에 나붙은 ‘점포 임대’, ‘권리금 없어요~’는 이제 흔히 보는 문구이고, 전통시장, 거리 소점포 앞에는 ‘재난지원금 카드 열렬히 환영합니다!’, ‘페점, 떙처리합니다~’ 등이 서로 경쟁하듯 행인들의 눈에 잘 띄려고 다투는 모습이다. 모두들 삶이 걍팍하다보니 그런가?. 요즘 글엔 재치와 유머가 사라지고 일말의 군더더기도 없다. 메마른 감정, 그것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삶의 위안을 주는 고마운 글판         


서울 한복판에는 지난 30여 년간 시민에게 위안을 주고 사랑받는 고마운 존재가 있다. 광화문 교보빌딩 글판이다. 일상에 지친 도시민을 위로하고 격려해 준 이 글판은 서울 세종로의 대표 명물이 되었다. 올해는 이 글판 시리즈가 100회를 맞았는데 월드스타 방탄소년단(BTS)이 직접 쓴 희망의 메시지가 담겼다. 교보빌딩을 거의 반쯤 통째로 뒤덮어 이번 글판은 평소보다 12배 큰 크기로 제작됐다.     

 

‘[춤]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허락은 필요 없어’   

  

이번 글판의 문안은 코로나 대유행으로 제약이 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어졌지만 고단한 하루 속에서도 허락받지 않고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자는 의미이다.    

 

그동안 시민에게 사랑받은 글편들 몇 가지가 떠올려진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이생진의 詩 시 ‘벌레 먹은 나뭇잎’中      

벌레 먹은 잎사귀의 흠집에서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희생의 고귀함이 담긴 이 문구는 여러모로 어려운 정치, 경제 상황이지만 서로 타인을 배려하자는 이타심을 일꺠워 주고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의 詩 ‘불꽃’ 中 -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의 詩 ‘방문객’ 中 -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 장석주의 詩 ‘대추 한 알’ 中 -          


30년의 세월 동안 이 글판은 시민들에게 많은 위로를 주고 사랑을 받았다. 이젠 광화문 글판의 성공에 힘입어 다른 대형 금융기관 건물이나 자방 도시 행정기관들도 비슷한 컨셉으로 감성 글판, 희망글판 등을 운영하고 있다. 감성적인 짧은 글로 지나가는 행인, 시민을 잠사나마 위안을 줄 수 있다면 그 어디 좋은 일이 어디 있나? 백번이고 칭찬할 일이다. 힐링이 꼭 경치 좋은 산꼭대기, 계곡 절경을 찾아가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바쁜 일상함께 공감하는 짧은 시()         


지하철역과 지하철 차량 객실은 도시민의 삶과 정서가 한껏 배어있는 곳이다. 무수한 상품 브랜드 광고, 아파트 분양 광고, 관청에서 게시하는 공익 캠페인, 지역 홍보 광고, 축제 홍보 등 오가는 이들의 관심을 끌고자 경쟁도 치열하다. 출근길 이른 아침엔 동시에 쏟아지는 승객으로 인해 분주한 터라 눈길을 줄 겨를도 없지만 퇴근길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기에 다소 넉넉한 마음으로 각종 다양한 글귀와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지하철 역사마다 있는 스크린 도어에 새겨진 짧은 시(詩) 한 편은 지친 하루를 달래주는 시원한 이온음료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유명 시인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의 작품은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가는 모양이다.   

       

하루 종일 넥타이에 매여 끌려 다니다가 그림자 밟고 집으로 오는 길

골목길 돌고 돌아 쪽대문 밀치고 들어 서면 크고 작은 종이 몇 송이

소박한 저녁상 차려 놓고 피워내는 하얀 웃음 

내 얼굴도 갓 떠오른 저녁달만큼 환해진다.  (시민공모작-윤주영의 詩 퇴근길)        


  

위트 있는 글귀를 보면 힐링이 된다!        

     

도시의 각 거리, 동네마다 무수히 많은 가게들이 있지만 지역마다 독특한 상호와 간판을 걸어 넣고 치열한 전쟁을 펼치는 가게, 상점들이 있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색다름을 주고 심지어 재미까지 선사한다. 이 정도면 이 가게 단골이 안 될 수가 있을까? 가게 주인장들이 수준급 카피라이터인 듯.   

       

‘인터넷 끊겨 내가 차린 PC방’ – pc방

‘저8계 콧9멍’ – 돼지 고깃집

‘머리 잘못하는 집’ – 미용실 / ‘머리에 무슨 일이 생길까’ - 미용실

‘밥집이라기엔 쑥스럽고 술집이라기엔 좀 그렇고’ – 식당

‘저 오늘 우럭 못 썰면 집에 못 들어갑니다’ – 횟집

‘육해공 지휘본부’ – 식당

‘그 꼴로 어디 가게?’ - 옷집

‘닭큐멘타리’, ‘닭치거라’ – 치킨집

‘인생 뭐 있어 고기서 고기지’ – 고깃집    

     

간판도 재미있지만 점포 내부의 벽면에 써 붙인 안내 문구나 직원 유니폼(티셔츠)에 새겨진 글귀도 무릎을 치게 하는 재치 있는 명구들이 많이 있다. 판매를 적극 권유하면서도 전혀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고급 위트가 녹아 있다.          


그뿐인가? 천천히 철학하듯 사색하듯 길을 걷다가 재미있는 문구를 찾아보면 정말 많다, 도시의 골목도 농촌의 마을 입구에도 우리네 살아가는 정서가 물씬 담아있다. 


오~새내기다. 화홝화홝 – 어느 대학 개강 기념

애미야~ 어서 와라~ 올 추석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해주마 – 농촌 마을 이장단

불효자는 ‘옵’니다 – 코로나 귀성을 만류

그날의 피로는 술로 푼다 – 청량음료 패러디 

코로나19 얼음짱속에도 개나리는 핍니다 – 지자체 주민 위로     

 

머리가 복잡할 땐 집과 사무실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 보라. 나가 보면 거리에서, 시장에서, 지하철역에서 공원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안식처들이 등장한다.  잠시 한 순간이지만 삶을 위로받고 마음속으로 통하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  황홀한 골목을 위.하.여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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